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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진張碩鎭(1874∼1967)
본관은 덕수, 자는 원대元大, 호는 지곡芝谷이다. 1874년(고종 11) 갑술생으로 문장과 서 예가 출중해 인근에 명망이 높았다. 교육에도 큰 관심이 있어 자기 집에 무료사숙無料私塾 을 세우고 이를 개방해 많은 후학을 육성했다. 그는 1967년 향년 93세 고령으로 별세했 다. 평택 충혼탑 비명碑銘에 그의 필치筆致가 남아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황노식黃魯軾(1881∼1945)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여태與泰이다. 오성면 양교리에서 좌찬성을 지낸 상산군 효원孝源 14세손으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충·효·예가 돈독했고 성장해서는 교육에도 특이한 관 심을 가졌다. 3·1 운동 당시에는 동리사람을 인솔하고 우리는 자주독립국가라고 주장하 면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고종이 죽자 초막을 마당에 깔고 망곡望哭했고, 3년의 복상服喪 을 마쳤다고 한다. 또한 부모님 봉양을 성심으로 했다. 사대의 예도를 엄히 여기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으로 일부 학자 간에는 기호지방의 예문가禮文家라 칭했다. 1943년 가뭄으 로 인한 대흉작으로 마을사람들이 굶주리자 자기 집 비축미를 풀어 구민했고 공공사업비 부담은 언제든지 자청해 많은 비용을 납부했다.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대로부터 집안 의 일을 해왔던 사람이 나이 들어 괴질에 걸려 찾아오자 그를 사랑방에 기거하게 하고 몸 소 자신이 병간호를 했다. 그는 소생했지만 노식은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했다. 말년에 자 기 집에 한문서당을 차리고 9년 간 자비부담으로 운영했고 신흥학원을 설립해 빈한한 인 근 동민들에게 신학문을 배우게 하는 등 많은 후배를 양성했다. 그는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余慶’이란 말과 ‘유재능이무근성有才能而無勤成이면 반불여무재능이유근성反不如 無才能而有勤成’이란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후손들에게 늘 강조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