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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칠원동七院洞113)
칠원동은 1동(칠원)·2동(새말)·3동(수촌)으로 형성됐다. 조선시대 진위현 여방면이었다가 1914년 세 마을을 통합해 송탄면 칠원리라 했다. 칠원리는 1981년 송탄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송탄시 칠원동이 됐고, 1995년 평택시 도원동으로 바뀌었다. 1998년 도원동이 동부동과 통합돼 송탄동으로 되었다.
원칠원은 조선시대 ‘갈원葛院’이 설치됐던 주막거리 마을이다. 현재는 쌍용자동차의 배후 마을로 동광아파트와 농협은행·식당·술집등이 형성돼있다. 해방 전에는 35호, 현재는 도로확장과 동광아파트 건설로 일부가 감소해 원주민만 30호쯤 된다. 경주김씨·경주최씨가 많았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원칠원의 경제사정은 좋지 않았다. 밭보다 논이 조금 많았지만 생산력이 매우 낮았다. 한국전쟁 뒤에는 고추·파·배추·미나리 등 채소 농사를 지었다. 채소는 새벽에 평택장에 내다 팔았다. 원칠원은 삼남대로를 중심으로 윗거리와 아랫거리로 나뉜다. 마을 남쪽 외딴 곳은 강당이라고 부른다. 북동쪽 옛 도원동사무 소 뒷산은 옥녀봉이고 이산메산 옆 큰 산은 산지봉이다. 쌍용자동차 기숙사가 있는 봉우리는 용산자리와 곰부리다. 마을 입구 선돌 있던 곳은 큰돌이라고 불렀고 숯을 굽던 가마터도 있었으며, 마을 남쪽에는 일본인들이 베어버린 수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었다. 원칠원은 주막거리 마을이어서 위상이 매우 낮았다. 경제력이 낮고 가난해서 받는 설움도 컸다. 형편이 나아진 것은 귀농정착사업과 쌍용자동차 건설, 새마을운동의 영향이다. 귀농정착 사업은 1961년 5·16 군사정변 뒤에 시작됐다. 서울 달농네 빈민들을 농촌에 정착시키기 위해 쌍용자동차공장 터 주변을 개발해 1호에 2천∼3천 평씩 불하했다. 귀농정착사업은 실패했고 1965년 경 서산사람 김태신이 토지를 매입해 평택목장을 만들었다. 평택목장은 1970년대 말 하동환 씨에게 평당 5천 원씩 매각돼 동아자동차가 됐고, 동아자동차가 쌍용자동차로 바뀌면서 오늘에 이른다.
칠원2동114) 새말은 ‘신촌新村’으로도 부른다. 새말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9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이농과 재개발사업의 영향으로 70호가 채 안 된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을 한다. 1970년대 말 칠원1동과 칠괴동 사이에 쌍용자동차가 들어서면서 젊은 층은 회사에 많이 다닌다. 마을은 갓골과 새마름 또는 아랫말과 윗말로 구분된다. 두 마을의 경계는 중간쯤에 있는 공동우물이다. 이산메산 동남쪽 골짜기는 강당이며 강당에는 고분야 저수지가 있다. 마을의 주산은 이산메다. 정상부는 매봉이라고 부르는데, 매봉 아래 큰 골짜기가 큰골이고 그 옆이 작은골이다. 마을 입구 주말촌에 있는 저수지는 쇠마름 방죽이다.
새말의 경제기반은 통복천 너머에 있는 건넌들과 고군배미다. 건넌들은 근대 전후에 개간됐지만 다랭이 논인데다 척박해 소출이 적었다. 1970년대 경지정리사업이 진행되고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좋아졌다. 새말에는 송만갑, 정정렬과 함께 근대 판소리 5명창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동백(1867~1949)의 유허(1939년부터 말년을 보낸 집터)가 있다.
칠원3동115) 수촌水村은 통복천을 사이에 두고 옛 평택시와 송탄시의 경계지역 마을이다. 규모는 해방 전후에는 50호, 한국전쟁 뒤에는 35호였다. 자연지명으로는 새말 아래에 위치해 ‘아랫동네’ 또는 물레방아가 있어 ‘물방아거리’라고 불렀다. 성씨는 윤씨·신씨가 많지만 대체로 여러 성씨가 섞여 산다. 마을 옆 통복천에는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유입됐다. 주민들은 통복천에 보를 막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도 했고, 그 전에는 식수로도 썼다. 새말과 수촌 사이의 쇠물뿌리는 행정구역 상 칠원3동에 속한다. 쇠물뿌리라는 지명은 마을지형이 와우형臥牛形이어서 유래됐다.
| 명창 이동백의 유허가 있는 칠원2동 새말(2009) |
| 방아거리로 불렸던 칠원3동 수촌 |
주석
113) 이충웅(2009년, 73세), 자택에서 인터뷰
박추월(2009년, 86세), 홍순희(2009, 80세), 칠원1동 경로당에서 인터뷰
114) 최종석(91세), 오만영(74세), 김항열(74세), 유형열(58세), 최기택, 2009년 1월 7일 인터뷰
115) 이은성(2002년, 87세), 최병인(69세), 윤상희(73세), 오찬영(2009년, 75세), 최연혁(70세), 칠원3동 경로당 및 경로당 앞마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