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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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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준姜漢駿


평택 출신으로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38년 기계과 자격증을 취득했고 1940 년 인천시 도원동에 있는 중앙상공사 기계공장을 인수 경영했다. 이 공장을 방문한 일본인 소방서장으로부터 장차 조선 사람들은 모두 만주로 이주시킬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나라 없는 민족은 억울한 일을 당한다는 생각에 이후 항일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1942년 황 선학黃善鶴·조규진曺圭鎭과 마음을 합해 황선학을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조직을 확대 98 명의 동지를 규합했다. 1949년 7월 13일 국내 철교와 군수공장을 폭파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화약과 도화선 등 필요한 장비를 영등포 구 로동 화약고에서 절취했다. 1944년 10월 3일 거사를 하기로 결정했으나 구로동 화약고에 서 화약을 도난당한 것을 일본경찰이 알고 수색 끝에 폭발물을 빼앗겨 거사에 실패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공재록孔在祿(1895∼1960)


1895년 1월 15일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 463번지에서 출생했다. 농업에 종사하면서 일제 의 경제적 수탈을 경험했던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인 4월 1일 오성면 안화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해 적극 참여했다. 같은 해 4월 3일 밤 마을주민 10여 명과 함께 동리 봉오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됐다. 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주동자는 공재록과 같은 마을 서당 한문교사인 김용성金容成, 농업에 종사하던 이사필李思弼 등이었다. 그는 5월 20일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기소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권익수權益洙(1898∼?, 이명 泰彙)


1898년 진위면 가곡리 313번지에서 출생했다.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를 목도하고 조국독립이 절실함을 인식했다. 1919년 9월 3일 경성 관철동 이기하李起河의 집에서 이시우李時雨 등과 일제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등사했다. 이시우로부터 문건을 접수해 경성 시내에 배포하고 같은 해 9월 12일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리고 노량진 유형식兪亨植의 집에 가서 의복을 갈아입고 안양으로 갔다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신교동에 은신했다. 그러나 9월 11일 동생 권길수權吉洙에게 보낸 편지가 단서가 돼 9월 15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됐다. 11월 2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1922년 1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운동사 자료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김만진金晩鎭(1919∼1992)


1919년 2월 12일 평택에서 출생했다. 일제의 압박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동생 김하진金夏鎭의 권유로 1934년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에 정착했다. 1936년 일심양복점一心洋服店을 운영했다. 1943년에는 한국 청년 광복운동 전선 송출에 전력을 다했고, 1944년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정보수집 및 자금조달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자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해 독립군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귀국한 이후 1975년 4월 19일부터 1977년 5월 6일까지 약 2년여 동안 광복회 충청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김봉희金鳳熙(1890∼1957)


1890년 12월 7일 진위군 북면 봉남리 270번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했다. 북면 봉남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가혹한 무단통치와 경제적 침탈을 체험하고 조국의 독 립이 절실함을 인식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북면 봉남리에 거주 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박성백朴成伯·최구홍崔九弘·유동환柳東煥·전영록全榮祿 등 은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일어난 조선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운 동을 계획, 태극기 30장을 만드는 등 시위운동을 준비했다. 3월 31일 오후 4시경 준비해 두었던 30장의 태극기를 흔들며 봉남리 주민 400여 명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주재 소 앞을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고 오후 6시까지 면내 각 동리에서 만세 시위운 동을 전개했다. 이때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는 400여 명의 군중들 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면서 시위를 주도했다. 일제에 의해 보안법 위반으 로 체포된 이후 징역 6월 형을 구형받았다.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에 처해졌다. 출옥 이후 일제 치하에서 취학 적령 아동들이 진위소학교에 취학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북면 유지 정경부인 구씨(영의정을 지낸 심순택의 처)를 설득해 봉남리에 금능학원을 설립했다. 이후 금능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아동들에게 배움의 길 을 열어주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좌익과 우익대립이 심하던 시기 우익단체의 대표로 공 산당 활동을 적극 저지하는 반공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해 인민군 치하에 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다가 아군 비행기 출현으로 호송병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해 도주 해서 살아났다. 이후 진위초등학교 기성회장을 다년 간 역임했다. 학교의 증축과 증설에 기여하는 등 지역사회발전에 이바지하다가 1957년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200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김상완金商完(1903∼1942)


1903년 음력 7월 15일 진위군에서 출생했다. 1927년 중국 무순현 장당에서 정의부에 가 입해 독립운동을 했다. 정의부는 일본군 습격, 군자금 모금활동, 독립선전 공작, 친일밀정 처단, 일본 관리 암살, 일본기관 파괴 등의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정의부는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해 벽동碧潼·초산楚山·철산鐵山 등의 국내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또한 재만한인을 위해 경제·문화기관을 설립하고 교육기관으로서 각 부락에 초등학교를 설립해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정의부는 흥경현興京縣에 흥화중학興和中學, 유하현에 동명중학東明中學을 설립했으며 혁명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화성의숙華成義塾을 설립하고, 기관지로 『전우戰友』, 기관신문으로는 『대동민보大同民報』를 발행해 재만한인의 항일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설립해 황무지를 매입하고 개간한 후 항일독립운동가 가족을 정착시켰으며 무기를 구입해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1929년 4월 정의부가 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와 함께 국민부國民府로 통합되자 국민부에 소속돼 독립운동을 했다. 국민부는 재만한인의 치안유지와 단일자치기관 실현 및 한국·중국 간 농지·소작문제 해결과 교육 사업에 주력했다. 국민부는 각 촌에는 서당을, 각 구에는 소학교를, 지방에는 중등학교를 설립하고 흥경현 왕청구문汪淸溝門에는 남만학원南滿學院을 설립 동인지로 『봉화烽火』, 기관지로는 『조선혁명朝鮮革命』 등 각종 간행물을 발행해 재만한인의 항일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32년경 일제에 체포돼 같은 해 7월 27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징역 1년 9월 7일로 감형돼 1934년 5월 출옥했다. 출옥 후 조선혁명군 대원으로 일본군과 교전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삼양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가을 귀국했으나 병환으로 인해 1942년 5월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김영오金永五(1920∼1993)


1920년 2월 9일 청북면 후사리 156번지에서 출생했다. 1931년 경성 제2고보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학교東京大學校에 입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했다. 1944년 중국으로 망명했고 상해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자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해 독립군, 북경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했다. 추모공작 및 군자금 모금활동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광복군 북경지구 특파단 군수과장으로 활약하다가 해방을 맞이했고, 이후 미군정청美軍政廳 조사연구소 조사과장을 역임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해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1956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김영철金榮哲(1892∼?)


평안북도 영변읍 서부동 출신이다. 독립운동 당시 고덕면 두릉리(계루지)에서 살았다. 1919년 관전현寬甸縣 청년단 연합회 의용대장으로 활동, 광복군 총관 부단장 결사단장으로 활약했다. 1920년 미의원단 래한을 계기로 특파 폭탄대로 김성택·김최명 동지와 경성에 잠입, 총독부청 종로경찰서와 남대문 역을 폭파하려다 사전에 발각돼 1921년 8월 21일 아 사원에서 체포돼 10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한국독립운동사』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김용성金容成(1894∼1954, 이명 용성溶成)


1894년 9월 13일 진위군 오성면 학현리 443번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 했다. 26세에 서당의 한문교사를 역임했다. 그는 일제 무단통치를 인식하고 평소에도 항 일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1919년 4월 1일 오성면 안화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 했다. 특히 이사필李思弼·공재록孔在祿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고, 같은 해 4월 3일 밤 오성면 학현리 봉오산에서 주민 10여 명과 봉화를 올리고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 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됐다. 1919년 5월 20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복 역했다. 광복 후 199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김하진金夏鎭(1924∼1992)


1924년 1월 25일 평택에서 출생했다. 1944년 중국 하남성 개봉지구에서 한국광복군 지 하공작에 참가했고, 1945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자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 해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대적선 공작 및 초모공작을 전개했다. 이후 중국 부양에 서 OSS 특수훈련에 자원해 최선발대로 훈련과정을 마치고 활동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해 1967년 근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 을 인정해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에는 건국포장을, 1992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으 로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남상환南相煥(1908∼1933)


서정동 430번지에서 출생했다. 1930년 3월 진위군에서 수진농민조합을 창립하고 동년 8월 조선농민 총동맹의 서기로 농민권익을 위한 활동을 했으며 1931년 11월 진위군에서 장주문·박상극 등과 수진적색농민 조합을 조직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가 체포됐다. 1933년 4월 폐병·위장병 등으로 예심 도중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나 4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해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중앙일보』, 『동아일보』



목준상睦俊相(1891∼1949, 이명 준상俊箱)


1891년 1월 6일 진위면 합정리에서 출생했다. 미곡상을 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소 뜻을 같이했던 이도상李道相·심헌섭沈憲燮·한영수韓泳洙 등과 함께 3월 11일 평택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시위 당일인 3월 11일 그는 이도상·심헌섭·한영수 등과 함께 평택역 앞 사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들을 선동했다. 이에 군중들은 모자를 벗어던지고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오후 5시경 시위 군중이 늘어나 수천 명이 집결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와 군문교로 행진했다. 이 사건으로 이도상 등과 체포돼 같은 해 5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후 정부에서는 199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박성백朴成伯(생몰미상)


진위면 봉남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일어난 조선 독립만세 시위운동 소식을 듣고 최구홍崔九弘·유동환柳東煥·전영록全榮祿 등과 공모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 태극기 30장을 만들었다. 1919년 3월 31일 오후 4시경 준비해 두었던 30장의 태극기를 흔들며 봉남리 주민 400여 명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주재소 앞을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고 오후 6시까지 면내 각 동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만세 시위운동을 하던 이들이 북면 면장을 끌어갔기 때문에 그는 치안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1919년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이에 항고했으나 8월 7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됨으로써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신순우申淳雨(1923∼1992, 이명 원)


1923년 1월 9일 청북면 고잔리에서 출생했다. 1934년 경성 마포에 있는 신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침략으로 생활의 터전을 잃고 조국 해방 기회를 엿보던 중 독립운동에 투신 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942년 중국군관학교에 유학할 목적으로 중국 왕래 일본상 선에 승선해 중국 남경南京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한인 지하공작원인 박영학朴永鶴 등과 접촉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자 광복군 징모에 참여해 제3분처에 입대했다. 여기에서 지하공작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초모공작 및 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중국 절강하교작전浙江河橋作戰에 참전해 공훈을 세웠 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80년 건국공로 포장을, 1990년 공적 재심사에 의거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안구현安九鉉(1886∼1970)


1886년 12월 13일 경북 울진군에서 출생했다. 경성으로 상경해 신학문을 수학하고 1905 년 귀향해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1912년 인천 제물포로 이주해 성공 회 영국인 선교사와 수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선교활동을 했다. 1919년 3·1 운동 당 시 인천부 용강동 2번지에서 살면서 이택화李宅和의 제의로 오창선吳昌善과 함께 상해임시 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이 될 것을 합의했다. 이택화가 3인의 명단을 상해임시정부 요원에 게 전달하자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인조견에다가 쓴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이라는 신 분증을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로 보내왔다. 그리고 권총 2정도 함께 보냈다. 1920년 2월 18일 오창선·이택화와 함께 진위군 오성면 숙성리에 사는 부호 김모 씨 집을 습격해 오창선은 김모 씨 집 앞에서 망을 보고 그와 이택화가 집안 내실로 들어가 김모 씨에게 상 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 신분증을 제시하고 소유금 100원을 수령했다. 이 일로 1920년 4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11월 26일 형 변경으로 4년 4개월 13일 만에 석방됐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77 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안육만安六萬(1900∼1980)


1900년 10월 20일 오성면 안화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 운동 때 청북면 백봉리 행 길에서 만세시위를 선동했다. 이에 호응해 최만화崔晩華·안희문安喜文·황순태黃順泰·정수만鄭水萬·홍기성洪奇成 등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된 뒤 8월 21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83년 대통령 표창을 주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안재홍安在鴻(1892∼1965)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다. 1891년 11월 30일 고덕면 두릉리 646번지에서 아버지 윤섭允燮과 어머니 남양 홍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907년 상경해 황성기독청년회 중학부에 들어갔다. 1910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해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정경학부를 졸업했으며 1912년 동경東京에서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朝鮮留學生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3년 1월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同齊社에 가입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해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다가 체포돼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朝鮮日報 주필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신간회新幹會 총무간사에 피임돼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해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해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27년 동삼성東三省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을 옹호하기 위한 동맹집행위원회同盟執行委員會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28년 7월 조선일보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금고 8월형을 받았으나 고등법원에서 기각돼 형이 확정됐다. 1929년 12월 전남 광주光州에서 학생운동이 봉기되자 당시 정치단체인 신간회와 협동해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있으면서 조선민중대회朝鮮民衆大會를 열고 일제의 민족 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돼 1930년 1월 1일 기소 유예됐다.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돼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조직에 참여해 활동했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돼 함경남도 홍원洪原 경찰서에 수감돼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등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납치됐다.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한민족독립운동사』, 국사편찬위원회
『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평택시항일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안종철安鐘喆(생몰미상)


비전리에서 출생했다. 일본의 침탈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가운데 동생 안종각安鍾珏 이 고종황제 국장 때 상경해 독립운동 광경을 보고 있던 중 누군가 모르는 청년이 인쇄물 을 주어 받아보니 두서에 ‘독립선언서’라고 씌어있는 것을 보고 고향에 돌아와 둘째형인 안 종철에게 보여준다. 이를 보고 감격해 조카인 안충수安忠洙를 불러 설명하면서 평택에서도 의거할 것을 당부했다. 안충수는 동창생인 이도상·목준상·한영수·민영환·안종각 등 과 회합해 의거를 결의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선언서를 등사한 뒤 3월 11일 거사하기로 결 정했다. 그리고 평택역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이 일로 인해 경 찰이 출동해 시위자들을 체포하고 경찰서에 구금시켰다. 안종철은 자신은 방면되고 학생 인 안충수는 교장 선생님이 보증해 풀려났다. 그러나 이도상·목준상·심헌섭·한영수 등 은 구금돼 재판을 받은 이후 수형생활을 했다.


1919년 3·1 운동 때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 지역의 어려움을 해소코자 여러 방면에 서 활동했다. 1923년 병남면 비전리에서 계인조합契仁組合을 동지 이성열·이종식·이하 선 등과 동민 40여 호를 조직해 조합장이 됐다. 지역경제 파멸을 막고 자작자급 하에 산업 과 부업을 장려해 동민의 복리를 증진시키려고 매호당 매식 30전씩과 여름에 맥 1두 가을 에 조 1두씩 출자해 자본금 1,800여 원을 조성해 농사에 쓸 비료 등을 공동 구입하고 농사 자금을 충당하는데 사용했다. 이후 계인조합을 상업조합으로 발전, 농민 및 서민의 생계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35년 면 협의회위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안충수安忠洙(생몰미상)


비전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졌을 때 숙부인 안 종철로부터 평택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할 것을 권유받는다. 평소 일제억압에서 국권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을 실천하고자 이도상·목준상·한영수·안종각 등과 함께 의거를 결의하고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1919년 3월 11일 독립선언서를 시내 곳곳에 붙이고 오후 평택역 앞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시위 도중 일본경찰에 체포 됐다. 이후 교장 보증으로 방면됐다. 당시 동지인 이도상·목준상·한영수 등은 체포돼 재 판을 받고 수형생활을 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그는 1930년 진청 야학원에서 무 산아동을 위해 교사로 근무했다. 그해 농민들을 위해 진안협동조합振安協同組合을 창립해 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1931년 4월 9일 동아일보 평택지국장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안희문安喜文(1898∼1979, 이명 光日)


1898년 4월 21일 오성면 안화리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한 이후 한성실업학교를 졸업했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조선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일제 검거가 시작되자 고향인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로 피신했다. 1919년 4월 1일 오성면 안화리에서 안육만安六萬·김원근金元根 등과 만세시위를 선동했고, 이에 최만화崔晩華·안희문安喜文·황순태黃順泰와 정수만鄭水萬·홍기성洪奇成 등 주민 2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주민 200여 명과 청북면 백봉리에 있는 주재소를 습격했으나 저지당했다. 이후 백봉리 큰길로 진출해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 체포됐고, 같은 해 5월 12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응해 제소했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0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돼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도 30여 회에 걸쳐 만세시위를 주도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출옥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하반신 불구가 됐다. 그러나 정신력으로 극복해 새문안교회 청년부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후 독립촉성단국민회 중앙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기독교 구호사업 회원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오성환吳成煥(1895∼1964)


1895년 8월 26일 안중에서 출생했다. 1923년부터 시작된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4년 조선형평사 본부의 이전문제서 경성으로 이전을 주장한 혁신파에 찬성의 뜻을 표했다. 장지필張志弼 등 20여 명 회원들과 1924년 2월 13일 대전에서 형평사혁신동맹衡平社革新同盟 준비회를 개최했다. 전라·경기·강원·평안도 등지의 회원들을 모아 3월 12일 천안에서 형평사혁신동맹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2주일 이내에 조선형평사 본부를 경성으로 이전할 것을 결의했다. 이 때 장지필 등 4명과 함께 조선형평사 경성 이전 준비위원장으로 선정됐다.


그리고 8월 15일 대전에서 전국 31개 형평사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형평사통일대회가 개최돼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가 발족됐는데 조사부 상무위원으로 임명돼 서무부 백송계白松溪, 재무부 조귀용趙貴容, 교육부 이이규李利奎, 사교부 이지영李祉永, 산업부 이학찬李學贊 등의 상임위원과 함께 사회개혁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전국 각지에서 반형평 운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4월 25일부터 26일까지 양일간 경성 시천교당에서 전조선형평대회가 개최 됐다. 여기에서 이학인李鶴仁·이춘봉李春鳳·이광수李光洙 등 20여 명과 함께 중앙집행위 원으로 선출됐다.


1926년 만주로 망명해 정의부의 양기탁梁起鐸·고할신高割信·현정경玄正卿·오동진吳東振·곽종대郭鍾大 등과 천도교의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송헌宋憲, 그리고 노령에서 온 이규풍李奎豊·주진수朱陳秀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해 참여했 다. 그런 가운데 12월 만주 장춘에 있는 동아정미소에서 이동락李東洛이 체포되면서 고려 혁명당 당원 16명과 함께 체포됐다.


1928년 4월 22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10월 10일 평양 복심법 원에서 형량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오창선吳昌善(1884∼1962)


1884년 1월 22일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164번지에서 출생했다. 일제 무단통치를 경험한 오창선은 조국독립이 절실함을 인식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입대해 일제 군사시 설을 방화하고 전투에 참여했다. 독립운동 자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내로 들어와 이택화李宅和의 제의로 안구현安九鉉과 함께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이 될 것을 합의했다. 이택화가 3인의 명단을 상해임시정부 요원에게 전달하자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인조견에다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 이라는 신분증을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로 보내왔다. 그리고 권총 2정도 보내왔다.


1920년 2월 18일 이택화·안구현과 함께 진위군 오성면 숙성리에 사는 부호 김모 씨 집 을 습격했다. 김모 씨 집 앞에서 망을 보고 안구현과 이택화가 집안 내실로 들어갔다. 안 구현은 김모 씨에게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 신분증을 제시하고 소유금 100원을 수령 했다. 2차로 계속해 모금할 것을 이택화와 모의한 이후 1920년 3월 10일 오전 1시경 다시 진위군 포승면 내기리 이모 씨 집으로 갔다. 이모 씨 집 앞에서 망을 보고 이택화는 집안 내실로 들어가 상해임시정부 군자금을 요구했다. 마침 그날 현금이 없었음으로 다음날인 3월 11일에 오면 주겠다고 이모 씨가 약속했다. 이후 약속일에 다시 이모 씨의 집으로 가 서 110원을 수령했다. 이 일로 1920년 4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원심창元心昌(1906∼1971, 이명 훈)


1906년 12월 1일 팽성읍 안정리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원유창元裕昌이다. 1918년 평택 보통학교(현 성동초등학교)를 졸업 후 1920년 서울로 상경 중동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중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3년 일본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1919년 평택지역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1922년 동지 박열朴烈 등과 함께 흑우회黑友會에 가입해 주동인물로 활동했다. 1924년 8월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최초 노동조합인 동흥노동조합東興勞動組合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9월 북경·상해 등지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에 진력했으며 1926년 5월 기관지 『흑우黑友』를 발행하기도 했다.


1927년 흑풍회黑風會를, 1928년에는 흑우연맹黑友聯盟을 조직했다. 1929년 4월 동경유학생학우회東京留學生學友會 폭력사건으로 징역 3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가 1931년 6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했다. 1932년 11월 천진 일본영사관天津日本領事館 일군병사日軍兵舍를 폭파하는데 모의했으며 1933년 3월 17일 흑색공포단 동지들과 회합해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주중駐中 일본공사가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만주포기 및 열하지방熱河地方 대일부저항對日不抵抗을 책동하는 음모를 폭로 저지하는 대책을 모의하고 이강훈李康勳, 백정기白貞基 등과 아리요시 아키라을 처단할 목적으로 대기하던 중 현장에서 3명 모두 피체됐다.


1933년 11월 24일 일본 장기재판소長崎裁判所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광복을 맞아 동년 10월 10일 복역 13년 만에 출옥했다. 1946년 신조선건설동맹을 창설해 부위원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이를 해체하고 재일본 조선인거류민단을 창설해 초대사무총장에 취임해 1951년 4월 민단중앙단장이 됐다. 1959년 ‘통일일보’ 창간대표로 평화통일운동에 노력하다가 1971년 7월 4일 동경에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묘는 대전 현충원에 있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유동환柳東煥(1897∼1941 이명 漢宗)


1897년 1월 28일 진위면 봉남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일어난 조선 독립만세 시위운동 소식을 듣고 박성백朴成伯·최구홍崔九弘·전영록全榮祿 등과 공모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했다. 1919년 3월 31일 오후 4시 준비해 두었던 30장의 태극기를 흔들며 봉남리 주민 400여 명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주재소 앞을 돌며 조 선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고, 오후 6시까지 면내 각 동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위운동 사건으로 치안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 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8월 7일 기각돼 1년 동안 옥고를 치렀 다. 이후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9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유만수柳萬壽(생몰미상)


진위면 봉남리에서 출생했다. 농업에 종사하면서 일제의 경제적 수탈을 당해 반일감정을 갖고 있었다. 박성백朴成伯·최구홍崔九弘·유동환柳東煥·전영록全榮祿 등이 1919년 3월 1 일 경성에서 일어난 조선 독립만세 시위운동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해 태극기 30장을 만들며 준비했다. 3월 31일 오후 4시경 준비해 두었던 30장의 태극기를 흔들며 봉 남리 주민 400여 명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주재소 앞을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연달 아 불렀다. 오후 6시까지 면내 각 동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징역 6월의 형을 구형받았으나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에 처해졌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윤교영尹敎永(생몰미상)


서탄면 출신이다. 1919년 3·1 운동 때인 4월 3일 정오경 서탄면사무소 앞에 400여 명 서탄면 주민들이 면장 윤기선尹箕善의 연락을 받고 모였다. 면장 윤기선이 선두에 서서 만 세를 부르자 윤대선尹大善 등과 적극 협력해 서탄면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격문을 돌리는 책임을 맡아 열성적으로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윤기선尹箕善(1866∼1922)


1866년 1월 7일 서탄면 사리 710번지에서 출생했다. 고종 때 을유무와 통정대부행 시종 원 시종으로 근무하다 낙향해 고향인 진위군 서탄면에서 면장으로 재직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나 전국 각지로 확산되자 서탄 면장이던 윤기 선은 4월 2일 새벽 면서기 한성수韓聖洙를 시켜 각 구장들에게 당일 오전 10시까지 주민들을 인솔해 서탄면사무소 앞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켜라. 만일 불참하면 뒤에 큰 환이 있으리라”는 격문을 작성해 각 구장들에게 보냈다. 4월 3일 정오경 서탄면사무소 앞에 4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였다. 윤기선은 “세계의 대세로 보면 조선은 독립할 시기에 이르렀다. 다 같이 경하할 일이며 복 받을 일이다. 이번에 내가 적에게 잡혀가는 일이 있으면 면민 전체를 벌주는 일이니 계속 투쟁하라”는 취지의 연설을 한 이후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윤교영尹敎永과 윤대선尹大善을 비롯해 많은 주민들이 호응해 만세를 고창했다. 이 일로 일제에 체포됐고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옥고를 치렀다.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후 태독으로 사망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윤대선尹大善(생몰미상)


서탄면 출신이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서탄면 한문교사로 재직했다. 4월 3일 정오경 서탄면사무소 앞에 400여 명의 서탄면 주민들이 면장 윤기선尹箕善의 연락을 받고 모였다. 이기에 참가해 윤기선의 연설이 끝난 이후 군중들에게 “우리나라가 독립하면 왜놈이 가지고 있는 모든 토지는 전부 몰수하고 동시에 왜놈은 우리나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격려하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윤주식尹周植(생몰미상)


현덕면 두매리(현 장수리)에서 출생했다. 중동학교 재학중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날 오후 4시경 서울 종로에서 군중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돼 경성지방 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해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이규선李圭璇(1895∼1955)


진위면 봉남리 282번지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현 오산시) 오산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면사무소에서 면장의 시위를 강력히 종용했으며 일본인 주택에 투석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8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정부에서 그 공적을 인정해 2006년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이덕순李德順(1879∼1966, 이명 병직炳稷)


본관은 전주. 1877년 4월 15일 울성리에서 출생했다. 1885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 로 이사했다. 이후 농업에 종사하면서 일제강점과 경제적 침략에 항일독립사상이 확립됐 다. 1919년 4월 1일 원곡元谷·양성陽城 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이근수李根洙·홍창섭洪昌燮 및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횃불시위를 격렬히 전개했다. 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를 습격, 불 지른 후 일본인 원곡면장元谷面長과 순사 등을 끌고 시위행진을 하며 일 본인 고리대금업자로 악명 높은 다카隆秀知의 집을 습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튿날 수비대 진압 소식을 듣고 피신했다가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으로 이주해 병직炳稷이라 는 이름을 사용하며 은거했다. 이후 12년 만에 이웃의 밀고로 체포돼 1년 간 복역했다. 정 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7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1990년 공적재심사에 의거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추서됐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이도상李道相(1890∼?)


비전리에서 출생했다. 미곡상을 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경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안충수安忠洙로부터 듣고, 평택에서도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3월 10일 밤 친동생 이덕상李德相에게 일체의 가사를 맡기면서 평택 장날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을 제창해 만세를 외칠 작정임을 말하고, 어머니를 잘 봉양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3월 11일 평택 역전에 서 장날이라 모인 군중들을 선동해 목준상睦俊相(29세, 미곡상), 심헌섭沈憲燮(32세, 농업), 한영수韓泳洙(28세, 농업) 등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친일파 한 사람이 소방 대 종을 쳐서 일제 경찰에게 신호를 보내자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동자 13명을 체 포했다. 이도상은 합정리 목준상, 비전리 심헌섭, 평택리 민응환閔應煥, 오성면 양교리 한 영수 등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됐다. 1919년 5월 5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아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5월 31일 기각돼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 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독립운동사 자료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이두종李斗鍾(1916∼1997)


1930년 3월 평택공립보통학교平澤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그 후 친구의 감화를 받아 항일투쟁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
1935년 11월경 실천운동을 위한 준비로 평택독서회平澤讀書會를 결성하고 회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다. 이두종은 이 같은 활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돼 1938년 7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 1939년 3월 28일 경성보호관찰소京城保護觀察所 보호관찰자로 분류되는 등 일제감시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 1939년 7월 상순경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수원읍水原邑 매향정梅香町 64번지 김계근金桂根의 온돌방 1칸을 빌려 극단 ‘향인좌鄕人座’를 설립했다. 과거 배우 활동경험을 살려 단원을 모집해 동지를 구하고 나아가 극단 활동으로 일반대중에게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려는 의도였다. 동년 8월 중순경까지 안수창安壽昌 등 5명의 배우 및 단원을 모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금난에 빠져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계근의 집에서 이원학李元學에게 신사회 건설 필요성과 자금주의 알선을 부탁하다 일경에 발각돼 체포됐다. 이로 인해 이두종은 194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해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이민백李敏白(생몰미상)


포승면 희곡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권익수權益洙가 찾아가 만세시위를 권했다. 권익수는 이민백에게 “나는 경성에서 온 학생인데 전국에서 온 민족이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고 있는데 수원군과 진위군만 잠잠하고 있소. 만세시위의 기일을 다시 연락할 터이니 그때 동리 사람을 지휘해 일을 하시오” 라고 했다. 이에 그는 3월 10일 청북면 마루산에서 점화된 봉화시위를 신호로 포승면 희곡리 대덕산 주민 200여 명을 모아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이병헌李炳憲(1896∼1976)


1896년 현덕면 권관리 455번지에서 출생했다. 보성전문대 법과생이던 이병헌은 1919년 1월 중순경 손병희孫秉熙의 지령으로 비폭력·대중화·일원화의 독립운동 3대 원칙을 기록해 동지들에게 전달했다. 2월에는 천도교 교단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5천 원을 인출, 이승훈李昇薰에게 전달했다. 2월 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돕고 이를 비밀리 에 천도교 교당으로 운반한 이후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경성 종로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 태화관 별실 6호에서 대기하던 청년 대표 6인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이병헌은 33인의 상황과 탑골공원에 운집한 군중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다.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전개된 시위운동에도 참여해 독립만세를 고창 하면서 시위행진을 주도했다. 이후 일제에 의해 체포된 민족대표 33인의 가족들에게 생활 비를 지원하는 활동을 계속 했다. 또한 경기도권 독립만세 시위에 관여했다. 독립의지를 설파하다가 3월 16일 수원 북수리 천도교 사건 때 중상을 입고 화성군으로 피신해 송탄· 평택지역의 학생들과 연락을 취했고 만세 시위운동을 고취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경찰전 문학교 총무과장과 경찰대학장 및 행정신문사 사장, 국사편찬위원 등을 역임했다. 국회의 원 제2, 3, 4대 선거에서 평택지역에서 무소속과 민주당 후보자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제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된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1959 년 『3·1독립 운동 비사』를 집필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93년 건국훈장 애 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론』, 국가보훈처



이봉순李鳳舜(생몰미상)


진위군 출신이다.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1919년 3·1 운동 때 같은 학교 3학년 염형우廉亨雨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군중들을 이끌며 경성시내를 행 진했다. 3월 15일 장용하張龍河·이춘봉李春鳳 등과 공모해 등사판으로 ‘조선 민족은 자신 을 먼저 가지라’는 제목 아래 ‘조선민족이 조선 독립운동을 함에는 자신을 가지고 나아가 라’는 내용의 문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등사해 경성부 관훈동 각 가정에 배포했다. 4월경에는 장용하·이춘봉·김기선金箕善·공흥문孔興文·서정호徐廷浩 등과 공모해 ‘조선 독립의 기회를 잃지 말고 결사 투쟁할 것’이라는 문건과 ‘반도半島의 목탁木鐸’ 이라는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문서를 만들어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같은 해 4월 18일 이봉순은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이후 7월 10일 경성 복심법원에 공소돼 태형의 처벌을 받았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이사필李思弼(1888∼1925)


오성면 학현리 482번지에서 출생했다. 평소에 항일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던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했다. 당시 31세로 농업에 종사하던 그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수탈을 경험해 1919년 4월 1일 오성면 안화리에서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진위군 일대의 조선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했다. 그는 김용성金容成(서당 한문교사)·공재록孔在祿(농업)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4월 3일 마을주민 10여 명과 함께 오성면 학현리 봉오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 일로 일경에 붙잡혀 5월 20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고했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돼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론』, 국가보훈처



이승익李承益(1886∼1942, 이명 공삼公三)


모곡리에서 출생했다. 조선조 정종의 7번째 왕자 수도군 이덕생의 19대 손이다. 일제강점기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180번지로 이주해 농업에 종사하면서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와 경제적 수탈을 경험하고 항일 독립의식을 갖게 됐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3월 28일 이근수李根洙 등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4월 1일 이덕순李德順의 권유로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 등이 전개한 안성군 양성면·원곡면 일대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이날 시위는 처음에는 양성면과 원곡면이 별도로 전개됐다. 이승익은 1천 여 명의 원곡면 군중들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면장을 선두로 횃불을 들고 양성면 쪽으로 행진했다. 시위대가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고개에 이르자 최은식·홍창섭·이유석 등이 연설을 하고 양성면에 있는 순사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 등을 파괴하기로 결의한다. 시위대가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 경찰주재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해산해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 시위대와 합류해 순식간에 시위대는 2천여 명의 군중으로 늘어났다. 4월 1일 오후 10시경 2천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양성 순사주재소 앞에 도착한 이승익은 시위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그리고 시위대 군중들과 함께 양성우편소로 가서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했다. 이어 일본인 잡화상 점포와 고리대금업자 집을 습격·파괴했다. 또한 양성면사무소에 침입해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시위 군중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4월 2일 오전 4시경 2천여 명 시위대와 함께 원곡 면사무소를 습격해 사무실 1동과 공용서류 및 물품을 파괴·방화하다가 일제에 체포됐다. 1920년 3월 22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보안법위반, 건조물 방화, 소요 주동범이라는 죄목으 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으로 감형돼 서대 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옥고 후유증으로 병석에 있 다가 1942년 4월 17일 타계했다. 이후 정부에서는 항일투쟁에 대한 공적을 인정해 1980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해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이약우李若雨(1903∼1978)


송북동 건지마을에서 출생했다. 경주 이씨 상서공파계의 진사공파 후손으로 아버지는 종구이다. 중농 집안에서 성장했고 일찍이 학문에 입문해 한학에 능통했다. 1919년 보통 학교에 다녔던 그는 신학문을 접하고 청년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 자 이병헌李炳憲의 영향을 받아 고문재高文在·민응환閔應煥 등과 함께 평택지역 만세운동 을 준비했다. 4월 1일 안성·평택지역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자 독립선언서와 태극 기를 들고 평택·송탄·서탄 지역을 돌면서 만세 시위운동 참가를 독려했다. 평소 농촌계 몽과 개발에 뜻을 두었던 그는 진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보통농림학교에 진학했 다. 수원보통농림학교를 졸업한 이후 1925년 고향에서 양묘養苗업을 전개했다. 해방될 때 까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치산치수에만 전념했지만 은밀히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고 한 다. 1945년 해방 이후 경성에서 조직된 군정청 감찰위원으로 활동했으나 곧바로 양묘업과 농업에 전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평택지역에서 한국민주당·민주 당·신민당의 야당에서 활동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이익종李翼鐘(1898∼1950)


1898년 4월 20일 고덕면 율포리 35번지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 운동 때 경성의학 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했다. 함태홍咸泰鴻 등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과 3월 1일 독립만 세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창덕궁 앞에서는 독립만세 시위대 군중들과 헤어져 종로 쪽 으로 나아가면서 2∼3명의 학생을 불러 “조선은 지금 독립하려고 한다. 같이 만세를 부르 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동했다. 그리고 많은 군중들을 지휘하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 고, 군중들과 종로의 4정목의 파출소 앞에서 독립을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 또한 박승영朴勝英·장기욱張基郁 등 시위 주동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을 출발해 종로·남대문·대한문 전·의주로 등 기타 지역 시위와 조선 독립만세 고창을 선도하며 열광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 일로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 공소돼 11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다. 그러나 1920년 2월 27일 기각돼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이일영李一榮(1863∼?)


1863년 12월 11일 팽성읍 본정리 39번지에서 출생했다. 1910년대 농업에 종사하면서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와 경제적 침략을 목도했다. 조국독립이 절실함을 인식하고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참여했다. 여기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운동에 주력했다. 진위군 서면 동창리에 거주하는 정창수가 300원을 기탁했고, 같은 마을 오정환과 오한근이 각각 100원을 기탁했다. 500원의 군자금이 조성되자 이 자금을 독립의군부의 주동인물인 곽한일에게 전달했다. 1919년 5월 전협全協과 양정楊楨 등이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자 윤용주·정창수 등과 함께 가입했다. 대동단 강령은 조선의 영원한 독립을 공고히 하고,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하며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한다고 했다. 같은 해 9월 전북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1번지에 거주하는 임응철林應喆을 경성부 황금정 2정목 이규문李圭文의 집에서 대동단원으로 가입시켰다. 10월 3일 임응철을 대동단 전라북도 특파원으로 임명해 ‘독립대동단 규칙’과 ‘국민해흑’이라는 문서를 가지고 귀향해 활동하도록 지도했다. 임응철은 익산에서 자신의 4남 임수명林守明과 숙부 임병대林炳大를 대동단에 가입시키고 대동단원 모집과 자금조달에 노력했다. 그리고 임수명은 김흥순을 권유해 대동단에 가입시킨 이후 신임장을 교부했다. 대동단원 운동비 60원을 받아 그 중 50원을 임응철에 송금했고 임응철은 그 돈을 다시 경성에 있는 이일영에게 송금했다. 1919년 11월 대동단 단원들은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해임시정부로 모셔와 행정수반으로 추대하고 제2의 독립선언을 발표해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강이 잠행했다는 보고를 접한 일제가 엄밀한 수사를 실시해 이강을 다시 경성으로 호송해 돌아오므로 대동단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일로 그를 비롯한 대동단 단원들은 출판법 위반과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안녕질서 방해죄로 일제에 검거됐다. 종로구치소에 수감돼 있다가 출옥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동아일보』



이조헌李祖憲(1900~1936)


본관은 함평咸平, 호는 수송秀松이다. 1900년 7월 12일 포승면 내기리 49번지에서 출생 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중국으로 망명해 연경에서 중화민국 북경대학을 졸 업했다. 북경대학 재학 시 상해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조국의 자주독립과 임 시정부의 재정문제를 자주 논의했다. 귀국 이후 상해임시정부 재정협조를 결심하고 고향 의 항일동지들 및 지주와 부자들을 설득해 진위구락부를 조직했다. 사무실을 평택군 현덕 면 운정리 이강헌李康憲 집에 설치해 운영했다. 진위구락부 회원명단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으나 이강헌·이민복李敏復·이민행李敏行·서상학徐相學 등 10여 명에 달했다. 일제 경 찰이 자신을 요시찰 인물로 설정하고 감시를 강화하자 친목회·체육회 행사를 구실삼아 집 후원에 테니스 코트를 만들어 놓고 테니스를 하면서 모이게 했다. 그리고 온양 및 기타 여러 지역에 소풍놀이 나가는 것처럼 위장해 일제 감시망을 피하곤 했다. 또한 진위구락부 회원들에게 비밀리에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고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운동을 추진했다. 일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진위구락부 회원들에게 운동장 건설비 명목으로 100원을 징수 했다. 모금된 돈을 상해임시정부의 이시영李始榮과 조소앙趙素昻에게 송금했다. 고향인 평택에서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이 불편하므로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이주해 과자점을 개업하 고 임시정부와의 서신연락 및 송금관계를 추진했다.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한 것 이 탄로나 일제가 인천에서 고향인 평택으로 강제이주 시켰다. 강제이주 후에도 신간회의 간부인 안재홍安在鴻과 긴밀하게 연락을 가졌으며 상해임시정부와 신간회와의 연락사항을 담당했다. 언어와 문학 및 풍속에도 관심을 가져 2년 동안의 연구로 『중어대전中語大全』이 라는 책자를 발간했고 『학해學海』라는 책자를 발간하는 등 많은 유고를 남겼다. 1934년 7 월 4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경성 의전병원에서 갑자기 서거했다. 유해는 평택군 포승읍 희곡리 선산에 안장됐다. 1945년 해방 이후 상해임시정부 요원인 이시영과 조소앙이 경성청운동에 거주하는 유가족을 방문해 그의 항일독립운동 업적을 치하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이택화李宅和(1884∼1974)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교운橋雲이다. 평택시 오성면 양교리 152번지에서 출생했다. 12 세 때 성공회에 입교해 독실한 신자가 됐다. 1919년 3월 1일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 국적으로 확산되자 고향인 오성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이후 성공회 전도사 가 돼 진천·천안 부대리·둔포 등지에서 전도 사업에 전념했다. 특히 천안 부대리(현 천 안시 부대동)에 있는 성공회에서 전도사로 있을 시 같이 있던 강희선 전도사와 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상해임시정부 요원으로부터 독립운동 필요성과 상해임시정부 활동상황과 재정상 난관이 많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군자금 모금원이 될 것을 자원했다. 군자금 모금원이 될 것을 승낙하자 상해임시정부요원은 2인을 더 추천해 줄 것을 부탁하고 상해로 떠났다. 이에 안구현과 오창선에게 동참하여 줄 것을 요청해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동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 요원이 인조견에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이라는 신분증을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로 권총 2정과 함께 보내왔다. 1920년 2월 28일 안구현·오창선 동지와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오성 숙성리 부호 김모씨 집에 찾아가 상해임시정부 모금원 신분증을 제시하고 취지를 설명하며 100원을 수령했다. 2차로 1920년 3월 10일 포승면 내기리 부호 이모 씨에게 군자금을 내줄 것을 요구하자 다음날 오면 주겠다는 약속으로 다음날 110원을 수령했다. 그러나 군자금 모금운동은 밀고에 의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모금된 돈은 원래주인에게 반환됐다. 이 사건으로 3인은 1920년 4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에 회부돼 보안강도죄로 안구현은 7년, 이택화·오창선은 각각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4년 8개월 복역 후 출옥했다. 출옥 후 1927년 청북면 덕우리(현 안중읍)에 정착해 성공회 덕우교회를 설립해 전도사로 활동했다. 또한 학현리와 덕우리를 잇는 바다를 막아 약 5만여 평의 농지를 간척했다. 그 후 덕우리 성공회가 번창하자 1935년 서부 4개 면의 중심지인 안중에 교회를 건축했으며 1936년 현덕면 덕목리 구진마을에도 성당을 만들어 교회부흥에 전력을 경주했다. 또한 당진에서 30만 평의 간척사업을 했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평생 한학과 교회전도 및 신도확장에 노력하며 후학을 가르치다가 1974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977년 건국공로포장 추서했다. 1990년 재심사에 의거 건국공로훈장애국장을 추서했다. 묘는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으며 유고로 남긴 한시漢詩 1,000여 수를 2009년 평택문화원에서 『교운일기橋雲日記』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전영록全榮祿(생몰미상)


진위면 봉남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경성에서 일어난 조선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소식을 듣고 박성백朴成伯·최구홍崔九弘·유동환柳東煥 등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3월 31일 오후 4시경 미리 준비해 두었던 30장의 태극기를 흔들며 봉남리 주민 400여 명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주재소 앞을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오후 6시까지 면내 각 동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치안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8월 7일 기각돼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정경순鄭庚淳(1892∼1959)


1892년 3월 25일 진위면 은산리에서 출생했다. 진위군 북면 주민들의 3·1만세시위운동 에 자극을 받아 4월 1일 정문학鄭文學·정재운鄭在雲 등과 만세시위를 권유했다. 이에 호응 한 주민들이 모이자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봉남리에 있는 주재소로 몰려가 시위운 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됐다. 1919년 5월 16 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상고했다. 7월 5일 징역 6월 로 확정돼 복역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200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정수만鄭水萬(생몰미상)


청북면 백봉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0일 오성면 안화리 안육만安六萬·김원근金元根 등과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 일로 일제에 체포돼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정우진鄭宇鎭(1925∼1958)


1925년 1월 10일 평택에서 출생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자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해 독립군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정우진의 공적 을 인정해 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공적재심사에 의거해 건국훈장 애족장 으로 변경 추서했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최구홍崔九弘(1891∼1979)


봉남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운동 소식을 듣고 박성백朴成伯·유동환柳東煥·전영록全榮祿 등과 공모해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태극기 30장을 만들어 놓고 만세 시위운동을 준비하던 중 3월 31일 오후 4시 봉남리 주민 400여 명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관 주재소 앞을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고, 오후 6시까지 면내 각 동리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치안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6월 21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공로로 정부에서는 2004년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최기원崔基元(1879∼1956)


1919년 포승면 일대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했다.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태극기를 만들어 인근 주민들과 면민들을 설득해 석정리 뒷산인 동굴봉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주재소에서 사건의 책임을 모두 자기에게 돌려 구속된 부락민들을 모두 석방하게 하고 혼자서 옥고를 치렀다.



최만화崔晩華(생몰미상)


오성면 안화리에서 출생했다.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제적 수탈을 경험했던 최만화는 1919년 3월 10일 청북면 토진리 오봉산과 마루산(현재 무성산), 그리고 청북면사무소가 있는 신포장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4월 1일 김원근金元根·안육만安六萬·황순태黃順泰·정수만鄭水萬·홍기성洪寄成 등과 청북면의 면민 수십 명이 백봉리에 있는 일본 주재소에 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저지당하자 백봉리 길거리로 진출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 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혀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최선유崔善有(생몰미상)


진위면 은산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 운동 때인 4월 1일 같은 마을의 정경순鄭庚淳이 중심이 돼 일어난 은산리 산위 시위에 호응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북면 봉남리 주재소 앞 만세시위에도 참가했다. 이 사건으로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됐다. 1919년 5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상고, 7월 5일 징역 6월로 확정돼 복역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최항진崔恒鎭(1881∼1919)


1919년 4월 3일 안성시 원곡면에서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등과 주동이 돼 만세운동 에 적극 참여했으며 양성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 등을 파괴해 활동하다 부상당했으며 1919년 4월 30일 안성경찰서장이 리민을 모이게 해 관청을 방화 파괴한 시위자를 색출할 때 일경들의 만행을 강력하게 항의하자 항의자 3명과 함께 현장에서 타살·순국했다. 정 부에서는 그 공로로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론』, 국가보훈처



한성수韓聖洙(생몰미상)


서탄면 출신이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서탄면사무소에서 면서기로 근무 했다. 4월 2일 새벽 서탄면장 윤기선尹箕善의 지시를 받아 당일 오전 10시까지 서탄면 주 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모이도록 각 구장들에게 전달했다. 4월 3일 400여 명의 서탄면 주 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집결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때 윤기선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 여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한영수韓泳洙(1891∼1939)


오성면 양교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조선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 나고 시위가 지방 각지로 확산되자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이도상李道相·목준상睦俊相·심헌섭沈憲燮 등과 평택에서 조선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결의했다. 3월 11일 평택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안충수安忠洙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평택역 앞 사거리에서 군중들을 선동하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군중들 이 호응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에 체포돼 같은 해 5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8월 징 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9년 5월 10일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한준택韓俊澤(1916∼2003)


현덕면 덕목리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항일정신이 투철했다. 안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3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학년 학생인 한동옥韓東玉 등과 함께 중앙반제동맹中央反帝同盟을 결성했다. 중앙반제동맹은 비밀결사체로서 공산주의 사상연구에 노력했다. 동시에 다른 학급에도 세포단체를 조직해 1933년 11월에 일어난 중앙보통학교 동맹휴학을 내부에서 조종했다. 이후 중앙반제동맹은 교내에서 잠행활동을 하면서 1935년에 일어난 중앙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도 조종했다. 동맹휴학 주도인물로 지목돼 종로경찰서에 검거돼 치안유지법과 폭력죄 피의자로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될 때 한상룡韓相龍 주선으로 석방됐다. 출감한 이후 일본으로 유학해 이화학을 전공한 후 귀국했다. 이후 후진양성에 진력하다 1945년 해방되자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1956년 40세 만학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캔사스주립대학에서 방사선 생물물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다시 원자력에 관한 연구를 하고 귀국했다. 이후 한국에서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한국에 생물물리학을 도입했고 한국물리학회를 발전·육성시키는 등 20여 년 동안 한국물리학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했다. 한양대 문리대교수, 원자력연구소 자문위원, 한국물리학회장, 홍익대 대학원장 등을 지냈다. 2003년 2월 2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매일신보』『동아일보』『한국경제』



홍기성洪奇成(생몰미상)


청북면 백봉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0일 청북면 토진리 뒷산인 오봉산과 마루산(무성산), 청북면 신포장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4월 1일 면민 수십 명과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안육만安六萬, 김원근金元根·홍기성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에 체포된 이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황순태黃順泰(생몰미상)


오성면 안화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4월 1일 청북면 백봉리에서 정수만鄭水萬·홍기성洪奇成 등과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날 오성면 안화리에서 안육만安六萬 그리고 김원근金元根·최만화崔晩華·안희문安喜文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 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 『평택시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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