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입법의원 선거(1946. 10. 23~29)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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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도입법의원 선거(1946. 1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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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2일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근거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설치를 규정한 군정법령 제118호를 공포했다. 이에 기초해 설치된 입법의원은 모두 90명이었다. 45명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민선의원이고, 나머지 45명은 미군정청 장관 하지가 선정한 관선의원 이었다. 민선의원의 대부분은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계였고 관선의원은 미군정의 중도정책에 따라 좌우세력이 배제되고 좌우합작파를 중심으로 임명됐다.
과도입법의원 선출 방식은 간접선거 방식이었다. 경기도의 경우 1946년 10월 23일부터 도내 각 반班 세대주에서 반대표 2명을 선출하고, 반대표들이 모여 리里 대표 2명을, 리 대 표들이 면面 대표 2명을, 면 대표들이 다시 군郡 대표 2명을 선출해, 이상의 부·군 대표 46명이 각 구 대표 1명 및 도전체 대표 1명, 계 6명의 도 대의원을 선거하는 방식을 취했 다. 경기도는 전체 5개 권역으로 나뉘었는데, 평택의 경우 안성·수원·시흥과 함께 제5구에 속했다.1) 10월 29일 부·군대표들에 의한 경기도 대의원 선거를 위해 2부 21군 대표 46명이 경기도청회의실에 모였다. 평택·안성·수원·시흥이 포함된 제5구에서는 평택군 대표 최명환崔鳴煥(56세)이 12표를 얻어 입법의원 경기도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일제강점기 평택읍회 의원을 지낸 최명환은 선거 당시 평택군수로 재직 중이었으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평택지부장을 맡고 있었다.2) 1946년 12월 12일 과도입법의원이 개원됐다. 1947년 1월 13일 입법의원 제12차 본회의에서 의원 41명의 이름으로‘반탁결의안’이 제출됐는데, 최명환 의원도 이에 함께 했으며, 1947년 5월에는 신익희·서상일·황신덕·김법린·박건웅 등과 함께 미소공위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정돼 활동했다.
과도입법의원은 1946년 12월 12일 개원해 1948년 5월 10일 선거 이후 제헌국회가 성립 되면서 해체됐다. 입법의원은 모스크바3상회의 협정에 의해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되 기 전까지 중대한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의 법규를 작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형식상 우리나라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군정장관의 인준권과 거부권으로 인해 자주적인 입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군정의 자문기구 역할에 그쳤다는 평가가 있다.

주석

1) 『조선일보』 1946년 10월 15일.
2) 『동아일보』 1946년 10월 30일. 최명환은 1884년에 태어나 1900년 수원 화성학교華城學校에서 일어와 한문을 수업했다. 1906년 대한제국 학부에서 시행한 일본유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해 관비유학생으로 가서 1907년에 동경부립제일중학교를 졸업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고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재일본한국유학생 단체인 대한유학생회, 대한학회大韓學會 교육부원, 대한흥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11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박물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경신학교 학감(1913년 사임), 1912년부터 보성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10월부터 1927년 9월까지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 1926년 조선체육회위원으로 선정됐다. 교장을 사퇴하고 평택 유천리로 내려와 1932년 평택지역 각 면을 순회하며 농촌진흥회 결성에 노력하고, 1943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평택읍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자신의 호를 창씨로 해于岡鳴煥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