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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졸 년 : 1868년∼미상
활동분야 : 기악가 / 경기도당굿 대금 시나위 명인·동령제 시나위 창시자
출 생 지 : 이충동 211-1(동령마을)
방용현은 방화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충동二忠洞 동령東嶺마을에서 태어나 경기도당굿 음악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무속 음악에 종사하면 주위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아 “어디가면 세끼 밥 한 그릇 못 먹겠는가”는 생각으로 서울 왕십리로 이주해 대금 시나위에 열중했다.
방용현은 1930년 판소리 명창 이동백·송만갑·김창룡 등이 설립한 ‘조선음률협회’ 정회원이 돼 라디오 방송과 무대 공연에 대금 연주자로 출연하면서 음반 취입을 하게 됐다. 또 굿청에 가서 대금을 연주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 공연에서는 이동안 일행과 호흡을 맞춰 공연하기도 했으며, 이들은 세습무 집안들끼리라서 서로 의기투합해 활발한 활동을 해나갔다.
방용현은 1927년 5월 27일 경성여자미술학교 교우회 주최로 열린 ‘조선정악대회朝鮮正樂大會’ 때 김형준·이성환·지용구 등과 함께 출연해 행진할 때 연주하던 행악行樂을 독주했다. 1930년 9월 15일 팔도명창대회 때 김기풍·김만송·김명수 등과 함께 풍류 공연에 출연했고 1933년 8월 12일 조선악협회朝鮮樂協會 주최 ‘조선악 감상의 밤’ 에도 출연했다.
1933년 8월 20일 조선음악학원 설립을 위한 ‘전통악과 무용의 밤’ 에 출연했고, 1938년 5월 2일 ‘전조선향토연예대회’ 때 최수성·김덕진·지용구 등과 함께 신선음악을 연주했다. 고재덕高載德·김주호金周鎬와 함께 취입한 ‘긴아리랑’, ‘성화타령’, ‘수심가’ 등은 폴리돌(POLYDOR)레코드사에서 녹음했다.
1933∼1941년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검무의 무용곡·무용풍악, ‘방아타령’을 포함한 수십곡의 민요와 ‘별우조타령別羽調打令’, ‘보렴報念’, ‘보허자步虛子’, ‘본풍류本風流’ 등 수십 곡을 방송했다.
방용현은 고향인 평택 등지의 굿청에서 대금을 불며 생계를 꾸려나가느라 서울 진출은 늦었으나 그의 예술적 혼은 그의 손자를 비롯한 후대에 이어졌다. 제자로는 평택 출신의
경기도당굿 해금 시나위 명인 지영희를 비롯해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1935년 광무좌단장光舞座團長과 국악예술학교 교사·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악장으로 활동한 대금 연주의 대가
김광식金光植과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였던 이충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