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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졸 년 : 1923∼1983년
활동분야 : 가야금 연주가 /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
출 생 지 : 광주광역시
성금연의 본명은 성육남成六男으로 광주光州 출생의 가야금 연주자다. 평택 출신 해금산조의 명인인 지영희池瑛熙의 부인이다. 1935년 조명수曺明洙에게 가야금풍류와 판소리를 배웠고, 1936년 안기옥安基玉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1938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입회해 연주활동을 했으며, 1949년 여성국극동지회女性國劇同志會에 입회해 창극에 종사했다.
1960년부터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 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했고, 1966년 지영희가 상임지휘자였던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해 제1악장으로 활동했다. 1968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그의 작품들은 기존의 가야금곡들과 다른 변별성을 갖는다. 기존의 열두 줄로 된 전통 가야금에서 벗어나 15현 가야금을 사용해 ‘춘몽’과 같은 즉흥성이 강조된 무용음악적인 작품도 있고 ‘꽃의 향기’처럼 산조의 장단진행을 따르지 않고 농악 장단 등을 가야금에 적용해 연주하거나, 15현 가야금을 통해 평조적인 가락을 살리고 특히 ‘흥’처럼 고음의 매력을 십분 살린 곡도 있다. ‘새가락별곡’과 같이 경기도당굿 장단을 가야금으로 담아낸 작품도 있다.
안기옥 가야금산조와 박상근朴相根 가야금산조를 토대로 새로이 ‘성금연류 가야금산조’를 만들어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 산조는 명쾌하고 감칠맛 있는 특성 때문에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가장 많이 연주됐던 가야금산조곡 중 하나였다.
1970년대 성금연은 보다 넓은 시각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본에서 열린 ‘EXPO 70’에 한국민속예술단장으로 참가했으며, 1971년 남편 지영희와 함께 세운 ‘한국민속연구원’의 이사 겸 원장으로 취임했다. 1972년 미국아시아학회 초청으로 미주 순회공연이 있었다. 김소희·지영희·김윤덕 등과 함께한 카네기홀 연주는 성금연이 연주가로서 경험한 가장 절정의 무대였다.
이 시기 그의 음악 속에는 강한 자신감과 도도함·당당함이 살아 숨 쉬고 있었으며 음악여정音樂旅程에 있어서도 숨 가쁘게 달려온 시기였다. 작곡에도 재질이 있어 ‘추상追想’, ‘새가락별곡’ 등 여러 가야금 독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제자로는 딸 지성자池成子·지미자池未子와 이재숙李在淑·황병주黃炳周 등 많은 가야금산조 명인이 배출됐다.
|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 성금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