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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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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백봉리栢峰里91)


대한제국시기 수원군 수북면지역이다. 1914년 백봉·조염동·벽동·평촌을 통합해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에 편제했다. 백봉리는 백봉산과 진위천 변에 형성된 마을이다. 수해와 염해를 많이 겪었으며, 마을의 변화도 많았고, 근대 전후에는 간척사업이 활발했다.


백봉리의 자연마을은 원백봉(1리)와 벽동(2리)이다. 백봉1리 ‘원백봉’은 옛날엔 ‘육자지’라고 불렀다. 육자지는 조선 태조 때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게 쫒겨난 6명의 왕자가 피신해 머물렀던 데서 유래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형제들이 피신한 것을 알게 된 이방원은 이들을 찾아내 죽였는데, 하늘에서는 오뉴월 삼복더위였는데도 눈이 내려 산을 하얗게 덮었다고 한다. 그 뒤 이 산을 백봉白峰으로 부르게 됐다.


백봉1리 ‘원백봉’은 약 50여 호로 여러 성씨가 모여 산다. 해방 전후만 해도 마을 규모가 지금의 두 배가 넘었고 오성면 경찰주재소도 있었다. 진위천은 조금 때는 고덕면 백봉리 부근, 사리 때는 서탄면 황구지, 진위면 마산리 앞까지 조수가 밀려들어 풍부한 어패류를 제공했다. 어업으로 생계를 삼는 사람은 드물었고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 경작지는 백봉리 남쪽들이었는데 지대가 낮아 수해가 잦았고 가뭄도 심했으며 농업용수를 구하기도 어려워 해창보를 쌓아 농업용수를 구하고 가뭄에는 메밀을 심어 식량으로 삼았다.


백봉2리 ‘벽동璧洞’은 전체 70호가 넘는 큰 마을이다. 완산견씨가 대성大姓이지만 오래된 성씨는 어연2리 안탑모퉁이 부근의 번말(벌말)에 거주했던 순흥안씨다. 청북면에서는 어연 2리 황곡마을에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나머지 성씨로는 김씨·고성이씨·전주최씨· 표씨가 있다. 김씨는 본래 현덕면 대안리에서 살다가 이주해 5대를 살았다고 한다.


벽동의 자연지명은 ‘구실’이다. 벽동璧洞은 구실을 구슬로 잘못 이해해 붙인 한자지명이다. 구실은 본래 두팽이라고 불렀다. 어느 시기엔가 구실로 바뀌었다고 한다. 구실마을은 남뜸·북뜸·가운데뜸으로 나뉜다. 1914년 자료에 백봉리는 백봉과 구실 외에도 도렴동과 평촌마을이 통합돼 형성됐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나이든 주민들조차 기억이 희미하다. 구실마을은 교육열이 높았고 공동체문화도 발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식도 강해서 3·1운동 때에는 백봉산에서 횃불시위도 크게 했다.



구실이라고 부르는 백봉2리 벽동(2008)

| 구실이라고 부르는 백봉2리 벽동(2008) |



주석

91) 이흥수(68세), 2005년 백봉1리 자택에서 인터뷰
김종균(77세), 이학석(81세), 소익서(77세), 최병문(81세), 김병문(72세), 표철균(89세), 2007년 12월 백봉2리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