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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치안·소방>소방>시대별 소방의 역사>삼국시대
■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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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시대 262년(미추니사금 원년) 금성 서문에 화재가 있어 인가人家 백여 동이 연소됐다는 기록이 있고, 596년인 진평왕 18년 빙여사에 불이 나 왕이 친히 이재민을 위문하고 구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인가가 연접한 도성 내에서 대화재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화재를 사회적 재앙으로 인식해 국가에서 구휼했다. 경주의 엄화사에는 문무왕 2년, 6년, 8년 계속 화재가 발생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소방이 전문적인 행정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성이나 읍성에서는 군사들과 성민들이 합세해 불을 껐고 지방에서는 부락단위로 소방 활동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880년(헌강왕 6) 9월 왕이 좌우군신과 더불어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관망했는데 가옥이 줄지어 늘어섰고 가락이 그치지 아니하므로 왕이 말하기를 “내 듣건데 백성이 집을 기와로 덮고 초옥으로 덮지 않았으며 밥을 짓는데 숯을 쓰고 나무를 때지 않는다하는데 사실이 그러한가?”고 묻자 신하들이 “폐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천지의 음양이 잘 조화되고 풍우가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의식이 풍족하고 변경은 안정됐으며 시정에서는 기뻐하게 되오니 이는 성덕의 소치”라고 했다. 위 기록은 당시 통일신라가 안정되고 도성 경주가 번창했다는 사실로서 많이 인용되고 있으나 방화防火면에서 볼 때 집을 초옥으로 하지 않고 기와로 됐으며 나무를 때지 않고 숯을 써서 밥을 지었다 함은 백성의 방화의식도 읽을 수 있다. 특히 가옥을 기와로 덮은 것은 방화를 위한 생활풍습이었다.
소방이나 경찰의 전문적인 행정 분야는 분화되지 못했고 군부나 일반 백성들이 소방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군대가 배치된 지방에서는 군대에 의해 소방 활동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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