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민투표-민정이양(1962. 12. 17)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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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국민투표-민정이양(1962.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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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한 뒤 일부 헌법을 정지시키고 민정이양 때까지 국가 최고통치기관을 담당했다.
내각이 총사퇴하고 국회가 해산됐으며,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돼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됐다.
8월 1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민정이양을 약속하고 대통령 중심제의 신헌법을 제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2년 3월 ‘구정치인 정화법’에 반발하며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행사하며 헌법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헌법 개정 초안을 작성했다.
1962년 10월 12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민투표 법안이 통과돼 국민투표법이 공포되고, 11월 5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제안으로 헌법개정안이 공고됐다.


| 박정희 의장 국민투표(1962.12.17) |


12월 5일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변경한 뒤 다음날 6일 투표일이 공고됐다. 개헌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중심제와 비례대표제 도입이었다.
국민투표는 12월 17일 월요일에 실시됐다. 전국 투표율은 85.3%, 유효투표 가운데 찬성률이 80.6%, 경기도는 투표율 84.4%에 유효투표 찬성률이 79.1%였으며, 평택군의 경우 투표율 83.6%에 유효투표 찬성률이 77.2%였다.2)

평택군민은 전국 평균이나 경기도 평균에 비해 낮은 찬성률을 보였다.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 개정헌법은 12월 26일 제3공화국 헌법으로 공포됐다.

 

주석

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 제1집(1948.5.10~1972.10.16)』,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