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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제도의 변천과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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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제도란 토지의 이용·관리·거래·소유 등에 관련된 제도를 말한다. 토지제도의 변천과정은 생산력의 발달 수준 및 그것을 둘러싼 정치권력과 생산관계의 변화상을 반영하 고 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사회에서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배층이 존재하고 있었고 일반농민층의 토지 소유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토지소유라는 기본 전제에서 신라는 문무 관료 및 관아에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신라는 687년 관료전을 나누어 주었고 689년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는 대신 조를 나누어 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녹읍제도가 혁 파된 지 약 70년 뒤 녹읍제도가 다시 실시되는 과정을 겪는데 국가의 입장과 귀족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각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지배 하는 호족豪族들이 등장했다. 호족의 성장과 대토지겸병 현상의 결과 농장이 각 지역에 형성됐다.
고려전기 토지제도는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였다. 이는 문무 관료 및 서리·향리·군인 등 직역 부담자에게 복무에 대한 대가로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를 지급한 제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12세기 이후 붕괴된다. 문벌귀족사회의 동요 현상과 무신정권 출현 등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장악력 약화가 다시 대토지겸병 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왕실·귀족·고위관료·사원 등이 주도한 대토지겸병은 농장農莊 형성으로 이어졌다. 농장은 매입·개간 등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조성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강제적으로 일반민 의 토지를 탈취하는 불법적인 형태도 많았다. 농장규모 역시 산과 하천을 경계로 할 만큼 넓은 지역이었다. 대농장 발달은 거란·몽고의 침입이후 백성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 다. 12∼13세기에 각 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농민항쟁은 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이었다. 이 시기 평택지역에서도 농민항쟁 사례가 있다. 1217년 진위현의 이장대李將大· 이당필李唐必·김례金禮 등이 거란족의 침입을 틈타 무리를 모아 봉기하고 창고를 열어 지역민에게 곡식을 나누어 준 사례1)가 있다.
고려후기 귀족들의 불법적 대토지겸병은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이에 전제 개혁을 주장하는 논의가 제기됐고 토지개혁은 1391년 과전법科田法으로 귀결됐다. 과전법은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모든 토지를 일단 국가수조지로 편성한 후 수조권을 국가재정 용도에 따라 각 기관에 나누어 주며 관료들에게는 경기지역에 한해 토지를 지급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과전이 경기지역에 한정해 지급됐으며 1398년 진위현이 경기도로 편성됐던 사실2)을 감안할 때 평택지역에도 과전이 설정됐을 것으로 보인다. 진위현의 경우 진위현령(종5품)에게 지급된 직전職田을 비롯해 아록전·공수전·원전院田 등이 설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445년에는 진위현을 대로大路)에 해당시켜 공수위전公須位田을 지급하는 한편 약점위전藥店位田을 혁파한 기사도 확인된다.3)
관인 수가 점차 증가하고 공신이 다수 설정돼 과전으로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1466년 세조는 과전을 혁파하고 현직에 복무하는 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했다. 성종 대에는 직전이나 사전의 조를 경작자가 국고에 직접 납부하면 국가가 수조권자인 관료나 공신에게 해당액을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했다.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전쟁 후 훈련도감은 둔전屯田을 설치해 수입으로 군사운영비를 부담하게 했으며 기타 일반 관공서에도 둔전을 설치했다. 왕실과 왕족들도 전란 이후 피해를 입은 토지 손실을 회복하기 위해 황무지를 지급받아 궁방전宮房田을 설정했다. 평택지역도 궁방면세전宮房免稅田이 설치돼 있었고,4) 수원부水原府의 궁내부宮內府에 속한 진위둔振威屯이 설치됐던 사례가 있다.5)
조선의 뒤를 이은 대한제국 광무정권은 갑오개혁 이래 국유지 조사사업을 계속 추진해 국유지에서의 지주제를 확인·강화하며 광무양전지계사업光武量田地契事業을 실시했다. 광 무양전 사업은 지주와 전호를 동시에 파악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지계地契라는 형식의 소유권증서를 발급함으로써 지주의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인해 주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을 실시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소유권에 대한 정밀한 조사를 하지 않은 채 지주의 토지소유권만을 배타적인 권리로서 인정 함으로써 농민들의 소작권은 모두 부인됐다. 또한 궁방전·둔전 등 국가기관 소유지나 분쟁을 야기하던 민유지 등도 모두 국유화해 물의를 일으켰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농지개혁農地改革이 실시됐다. 농민의 토지소유 실현을 촉구하는 농민과 지주의 권리를 고수하려는 지주층 사이의 대립이 치열했으나 농지개혁은 결국 지주층의 입장을 반영한 ‘유상매수 유상분배’ 원칙 속에서 진행됐다. 그 결과 약 47만 정보의 농지가 분배돼 지주제가 무너졌다.



주석

1) 『高麗史節要』 권 15 高宗 4년 1월
2)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10 振威縣 建置沿革
3) 『世宗實錄』 권 109 世宗 27년 7월 乙酉
4) 『振威縣誌』, 1891.
5) 『水原郡邑誌』, 1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