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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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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리新里75)


고려 때 오타장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수원부 오타면과 진위군 고두면 지역이었다. 1914년 수원군 언북면의 중대와 고두면 신리(새터)를 통합해 신리新里라고 해 진위군 오성면에 편입했다. 자연마을은 삼궁원(1리), 새터(2리), 삼동촌(3리), 중대(4리)가 있다. 근래 연립주택이 건립되면서 인구가 증가한 삼궁원이 130여 세대, 새터가 60여 세대, 삼동촌이 25세대, 중대(중다리)가 60여 세대다. 신리라는 지명은 2리 새터에서 유래됐다. 새터는 새말, 신대, 신흥으로도 불려지지만, 행정명으로는 신리로 쓰여 지는 경우가 많다. 삼동촌은 본래 뱃터였다. 고덕면 궁리의 다라고비진이나 동고리의 이포진에서 배를 타고 삼동촌 뱃터에 내렸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나루에는 주막 한두 집뿐 큰 마을은 없었다. 신1리 삼궁원은 조선후기 간척이 확대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본래 배다리가 있어서 주교포舟橋浦로 불렸다. 옛날 삼동촌에서 내린 사람들은 삼궁원 배다리를 건너야 숙성리나 안중으로 갈 수 있었다. 삼궁원이라는 지명은 조선 후기 궁방전의 흔적이다.


이 지역은 저습지여서 식수는 물론이고 허드렛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진위천의 침식작용도 살아가기에 힘든 요인이었다. 신리 일대의 황무지와 갯벌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대규모로 간척됐다. 오성들의 가등농장·평원농장·임전조선농장은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이었다. 주민들은 일본인 농장의 소작농들이었다. 소작농들은 마름들과 농장사무실 직원들의 횡포에 허덕이며 해방 전후까지 척박했던 시절을 살아냈다. 주민들이 자영농이 된 것은 미군정의 적산농지불하와 농지개혁 때문이다. 한국전쟁 뒤 추진된 간척사업도 농지확대에 영향을 끼쳤다.



조선후기 궁방전이었던 신리(2007)

| 조선후기 궁방전이었던 신리(2007) |



주석

75) 정교훈(66세)씨는 조부가 고덕면 궁리 건군이 마을에 살다가 일제 때 이주한 분이다. 신종구(67세), 남상옥(7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