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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교리梁橋里74)
양교리는 대한제국시기 수원군 숙성면 지역이다. 숙성면 시기에는 양교3리 대겸당리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양교리는 오봉산이 현무를 이루고 형제산이 백호를 이루고 있는 오성면 최고의 길지吉地다. 자연마을은 1리 원양교 또는 양다리, 2리 고렴, 3리 신흥동 또는 분가촌, 4리 겸댕이, 5리 여술 또는 여수, 6리 신기(새터)와 같은 6개 자연마을로 형성됐다.
양교1리는 ‘원양교(양다리)’ 마을이다. 양다리라는 지명은 양교2리 고렴으로 넘어가는 관리천 상류에 다리 두 개가 놓여 유래됐다. 전주이씨 능원대군파 동족마을로 전주이씨는 6대 200여 년을 거주했다. 마을규모는 30여 호다. 양교2리 고렴은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다. 본래 ‘구래미’, ‘개각뿌리’, ‘태끌이’, ‘삼태평’으로 불렸다. 고렴이란 지명도 ‘구래미’를 한자화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렴마을에는 청주한씨·상주황씨가 많이 산다. 양교3리는 ‘신흥동’ 또는 ‘분가촌’이다. 신흥新興이라는 지명은 보통 새로 생긴 마을에 붙여진다. 한국전쟁 뒤 피란민들과 그 뒤로 이주한 사람들이 형성했다. 양교4리 대겸당은 양교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겸댕이라고도 부르지만 큰말로도 부르고 있다. 2001년 편찬된 『평택시사』에는 ‘예부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많았고 권문세가와 예禮를 숭상하는 문장가들이 살아서 노복들에게까지 기와집을 지어줬기 때문’에 유래됐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적다. 이 마을은 갑오개혁 뒤 숙성면의 소재지였다. 1914년 숙성리로 옮겨갔다.
양교5리는 ‘여수麗水’ 또는 ‘여술’이다. 마을 규모는 30여 호다. 수성최씨와 청주한씨가 많다. 수성최씨는 고려 말 최영장군의 후손이며 청주한씨는 입향조 한오유가 경기도 안산의 반월에서 이거한 뒤 6대 250여 년을 거주했다. 여술마을 뒤로는 오봉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넉넉한 마을이었다. 또 청북면으로 넘어 가는 큰길가에 마을이 있어 교통도 편리했고 과객過客들의 왕래도 많았다. 근대 이후 저지대로 경작지가 확산되면서 쇠락했다. 여술마을 서쪽 양교6리 ‘새터’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는 문장자 고개다. 이 고개에 옛날 여술마을의 큰 부자였던 문장자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실제로 문장자 묘墓와 비碑, 망주석 등이 있다. 새터는 6∼7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예로부터 독립된 행정리였다.
오봉산은 오성면의 상징이며 3·1운동 때에는 주민들이 횃불시위를 벌였던 장소다. 오봉산에 장수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장수의 발자국이 움푹 패어 있는데, 발자국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무예를 닦던 장수가 오봉산에 한 발을 딛고 백봉산까지 펄쩍 뛰어 넘어가면서 남긴 것이라고 한다. 양교4리 느티나무 어린이집은 경쟁보다 나눔과 섬김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11명의 부모들이 모여 2000년에 개원했다. 공동육아협동조합이므로 필요한 기금은 부모들의 출자로 충당했고, 교육내용도 관계학습과 나들이 체험학습을 위주로 했다. 일제강점기 양교2리 뒤쪽에는 양교리강습소가 있었다. 강습소는 황로식과 동생 황노철, 그의 아들 황욱재가 운영했다. 양교리 강습소는 1943년 오성초등학교로 통합됐다. 교사들도 대부분 초등학교 교사로 전직했다.
| 마을 앞에 다리가 두 개 있는 양교1리 양다리(2012) |
| 옛 숙성면의 면소재지 대겸당(2006) |
주석
74) 이순헌(69세), 이기량(61세), 2003년 양교1리 마을에서 인터뷰
이귀순(82세), 2003년 양교2리 자택에서 인터뷰
정주화(2003년, 70세), 정완영(2007년, 80세), 한상복(2007년 75세), 최승돈(2007 년, 80세), 곽영철(2007년) 양교4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