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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숙성리宿城里73)
대한제국 시기 수원군 숙성면이다. 1914년 숙성리·대조두리·소조두리·월량촌을 통합해 숙성리라고 했다. 오성면의 면面 소재지로 오성주민센터를 비롯해 각종 관공서와 공공시설이 모여있다. 자연마을은 원숙성(1리)·대조두(2리)·소조두(3리)·숙신대(4리)·시장(5리)이 있다. 4개였지만 원숙성 마을이 확대되면서 1리와 5리로 분동돼 현재는 5개가 됐다.
원숙성의 자연지명은 ‘잔재’와 ‘시장’이다. 잔재는 구릉에 마을이 형성돼 작은 고개도 있 어 유래됐다고 한다. 근대 이전만 해도 숙성5리 오성장로교회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나루터도 있었고 포구상업도 발달했다. 포구에는 주막酒幕도 있어 ‘주막거리’라는 지명도 전한다. 마을규모는 200호가 넘고 달성서씨가 대성大姓이며 10대 300년 이상 거주했다. 일제강점기 대지주였던 서의관(의관은 벼슬 이름)과 서일학원을 운영하던 서병창도 달성 서씨의 후손이다. 서일학원은 1935년 보성전문 출신의 서병창이 오성중학교 자리에 세운 6년제 사립학교였다. 민족의식이 강해 우리말 우리글 교육을 강조했고 협동조합을 조직해 빈농들의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서일학원은 1943년 오성초등학교로 통합됐다. 원숙성마을에는 1930년대 말 오성간이학교가 설립됐고 1941년 오성초등학교가 됐다. 1943년 양교리강습소와 서일학원이 통합됐다.
숙성2리는 자연지명으로는 ‘큰조머리’ 또는 ‘큰밀머리’, 한자로는 ‘대조두大潮頭’다. 대조두란 바닷물이 들어오는 상한선이다. 마을을 개척한 사람들은 표씨였지만 300여 년 전 나주정씨 수사공파가 입향하면서 발전했다. 나주정씨는 조선후기 과거에 장원급제자와 당상관 진출자가 나오기도 했지만 자손이 귀해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숙성3리는 소조두다. 소조두의 자연지명은 작은조머리 또는 작은밀머리다. 소조두라는 지명도 바닷물과 관련됐다. 소조두는 숙성4리 숙신대와 함께 근대 이후에 분동됐다. 숙성4리 숙신대는 근대전후만 해도 수원부와 충청도 직산현의 경계지역으로 ‘수원새터’라 불렀다. ‘숙신대’라는 지명도 숙성리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숙성5리 시장마을은 숙성리장이 열렸던 장터마을이다. 숙성리장은 1911년경 편찬된 『조선지지자료-경기편』에도 나오는 근동에서는 알아주는 장시場市였다. 개장일은 매월 3일, 8일이었으며 오성들과 청북면의 물산들이 거래됐다. 일제 말 강제공출하던 곡식과 가마니가 집산되기도 했다. 주요 거래품목은 미곡이었고 잡화전·채소전·어물전이 있었다. 숙성리장은 1970∼80년대 교통이 발달하면서 기능을 상실했다. 2000년대 이후에 다시 개장됐지만 옛 위세를 찾지 못했다.
| 작은 조머리라고 불렀던 숙성리 소조두(2007) |
주석
73) 정우진(81세), 2006년 8월 숙성1리에서 굴다리에서 인터뷰
정현진(75세), 안흥식(73세), 숙성2리 거주, 2006년 2월 숙성2리 경로당에서 인터뷰
김교일(74세), 숙성3리 거주, 2004년 8월 숙성3리 마을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