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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길음리吉音里80)
조선후기 수원부와 직산현 지역이었다. 갑오개혁 뒤 수원군 오정면이었고 1914년 진위군 오성면으로 통합됐다. 남쪽으로는 안성천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야트막한 구릉이 발달해 논농사와 밭농사가 고루 발달했으며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는 어업도 크게 발달했다. 자연마을은 본래 ‘미촌리’와 ‘길음리’만 있던 것이 1914년 승량면 미촌과 언북면 홍원을 통합하면서 규모가 확대됐다. 길음이라는 지명은 ‘질음’에서 왔다. ‘질음’이라는 말은 ‘질퍽하다’의 줄임말로 바다와 가깝고 주변에 습지가 많아서 땅이 질퍽하다하여 유래됐다.
자연마을은 ‘원길음(1리)’, ‘내탑(2리)’, ‘미촌(미삐, 3리)’이 있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안성천 변에 양산말과 홍원이라는 마을이 있었지만 침식작용으로 폐동廢洞됐다. 길음1리 원길음은 40여 호가 모여 산다. 마을은 조선후기에 개척됐다고 한다. 길음이라는 지명은 ‘닭(금계)이 큰 울음을 우는 형국’이기 때문이라는 풍수적 해석도 있지만, 안성천에 가까워 땅이 질퍽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길음2리 내탑은 ‘안탑골’이라고도 부른다. 내탑이라는 지명은 당거리 탑현 안쪽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규모는 40여 호로 원길음과 비슷하지만, 1974년 아산만 방조제 건설 후 경작지가 확대되면서 충남 보령시나 공주시에서 외지인들이 많이 이주하면서 규모가 확대됐다. 길음3리 미삐는 미촌이라 부른다. 마을규모는 35호다. 금녕김씨가 많고 마을 역사는 대략 200여 년으로 추산된다. 폐동된 양산말은 본래 ‘갯고랑’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옛 양성현 땅이다. 어업이 발달해 어부들은 이른 봄이면 흰돛을 단 목선을 타고 숭어·강다리를 잡았다. 양산말과 함께 수몰된 홍원마을은 직산현 언북면 땅이었다. 원院이란 소규모로 간척된 땅을 말하는데 홍원은 간척지洪院가 넓어 ‘넓은들’ 또는 ‘홍원’이라고 불렀다.
| 본래 어촌이었던 미삐(2007) |
주석
80) 김원규(73세), 김완규, 1997년과 2004년 6월 미촌마을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