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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잔리高棧里84)
고려시대에는 감미부곡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양성군 감미면지역이다. 갑오개혁과 1896년 13도제 실시 때 수원군 감미면으로 통합됐고 1914년 후수리·전평·중평·후평·고잔리·대곡·목진면 후평리를 통합해 진위군 청북면 고잔리라고 했다. 고잔리라는 지명은 ‘곶(串)의 안쪽 마을’에서 유래됐다. 곶은 갑岬 또는 단端이라고도 하고, 흔히 관(串)자를 빌려 쓰면서 ‘관’ 또는 ‘곶’으로 부른다.
고잔리는 후평(1리)·전평(2리)·원고잔(3리)·원목(4리)·대곡(5리)·혁명촌(6리)·청룡(7리), 전평에서 분동된 서대울(8리) 등 8개 자연마을로 형성됐다.
고잔3리 ‘원고잔’ 마을은 고령신씨 동족마을로 ‘도마지’라고도 한다. 도마지란 ‘도망지’라는 말에서 유래됐다. 고잔리 고령신씨는 암헌공파巖軒公派로 세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암헌공 신장申檣의 후손들이다. 신장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3남이 보한재 신숙주다. 신숙주의 아들 항沆은 성종의 부마, 손자 의儀는 중종의 부마가 됐으며, 큰 아들인 봉래공 주澍의 셋째 종호從濩는 과거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진사시·문과·중시에 모두 장원급제해 천재성을 만천하에 떨쳤다. 고령신씨가 경기남부지역에 정착한 것은 신숙주의 현손 신수경 때부터다. 수경은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네 형제가 남양만의 향남·양감·청북으로 이거했다. 고잔리에는 봉래공 주澍의 셋째아들 삼괴당공 종호의 후손이 입향했으며 이웃마을인 전평(앞들)에는 둘째 종옥의 후손들이 세거했다.
고잔4리 ‘원목’은 이 지역 최초의 간척지다. 지명에서 ‘원’은 소규모 간척지이고 원목은 새로 쌓은 원의 입구(목)였다. 원목들이 간척되면서 이주민들이 유입됐다. 이주민 마을은 들판을 중심으로 앞·중간·뒤쪽에 형성돼 앞들(전평)·중간들(중평)·뒷들(후평)이다.
고잔1리 ‘후평’은 가장 먼저 간척된 들이다. 후평의 자연지명은 ‘뒤들’이다. ‘뒤들’은 예전 고잔8리와 같은 마을일 때는 7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마을이 두 개로 분동分洞되면서 지금은 50호로 줄었다. 앞들은 예나 지금이나 40여 호다. ‘뒷들’의 연안김씨는 문익공파로 이곳에서 10대 300년간 거주했다고 했다. 지금도 전체 50호 가운데 20호가 김씨다. 간척하기 이전 바닷물은 39번 국도가 지나는 서대울(8리)까지 들어갔다. 이것을 일제강점기에 간척했고 경작지가 늘어나면서 인구도 증가했다. 서대울의 고잔저수지가 축조된 것도 일제강점기다.
고잔5리 ‘대곡’은 우리말로 큰골이다. 이 마을은 원고잔처럼 곶串의 안쪽에 위치했지만 마을 규모가 커서 큰골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고잔6리 ‘혁명촌’은 한국전쟁 후 피란민들이 형성한 마을로 농골이라고도 부른다. 혁명촌이 자연마을로 독립된 것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다. 마을이름도 군사정변의 이름을 빌려 ‘혁명촌’이라고 지었다. 고잔7리 ‘청룡’은 충청도의 ‘청靑’과 마을이 번성하라는 뜻의 ‘용龍’자를 합해 유래된 지명이며 대청댐 수몰 이주민들의 마을이다. 서대울로 불리는 고잔8리 ‘서대곡’은 고잔1리에 속했던 것이 나중에 분동分洞됐다.
| 고잔리의 중심 고잔3리 도마지(2011) |
| 고잔리에서 가장 먼저 간척된 고잔1리 후평(2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