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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계리三溪里85)
조선시대 양성현 감미동면 지역이다. 삼계리에는 모두 5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삼계라는 지명은 하천의 삼합류三合流 지점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삼계1리는 ‘원삼계’다. 원 삼계마을은 윗말과 아랫말로 구분된다. 윗말은 본래 있던 마을이고 아랫말은 바닷가에 드문드문 길게 늘어섰던 마을이다. 아랫말에는 일제강점기 동척농장사무소와 창고가 있었고, 지금은 삼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근대 이전만해도 바닷가 마을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동척농장들이 간척되면서 농촌마을로 바뀌었다.
삼계2리는 ‘독개’라고도 부르는 옹포로 호戶 수는 40호쯤 된다. 성씨는 매우 다양하다. 조선시대 옹포는 양성현의 해창海倉이었다. 해창은 해운창의 줄임말로 세곡稅穀을 수집해 보관했다가 수로水路와 해로海路를 통해 경창京倉까지 운송하던 조운창이다. 양성현의 해창이 이곳에 있게 된 것은 해운수송을 할 수 있는 바다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 초만 해도 인천 도정공장에서 들어온 배들이 옹포의 벼 2백 섬을 실어갈 정도로 포구 규모가 컸다고 한다. 1899년 양성읍지에도 다양한 거래품목은 물론 객주와 여각이 있다고 할 정도로 매우 번성한 포구였다. 옹포는 1920∼30년대 동척농장들이 간척되면서 급격히 역할이 감소했다. 장둑 아래 포구는 동척농장에서 수확한 곡물이나 강제공출미를 인천으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
삼계3리 ‘신촌’은 원 삼계마을 동쪽에 있다. ‘새말’, ‘벌말’, ‘분말’이라고도 부른다. 벌말은 벌판 쪽에 나앉은 마을이다. 옛날에는 조수가 마을 앞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이 마을이 들판에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고 한다. 삼계4, 5리는 한국전쟁과 1960∼70년대 간척사업 때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삼계4리는 ‘달마골’ 또는 ‘월곡月谷’으로 불린다. 삼계5리는 ‘신영촌’과 ‘성곡’이다. 신영촌은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새로 만든 마을로 ‘개발단’이라고도 부른다. 청북면 일대에는 한국전쟁 후 피란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했거나 남양만방조제 건설 후 조성된 간척지가 많은데 이 마을도 그런 경우다. 성곡은 마을 뒤에 성곽城郭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됐다고 전한다.
| 조선시대 양성현의 해창이었던 삼계2리 옹포(2008) |
| 일제강점기 동척농장들 간척의 흔적 장둑(2008) |
주석
85) 이정순(84세), 2005년 11월 옹포마을 앞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