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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궁리宮里64)
궁리는 대한제국시기 수원군 오타면 지역이다. 고려 때에는 오타장五朶莊이 설치됐고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이 진위현 오타면이었다. 1914년 고두면의 건곤·오타면의 건곤과 궁리·신리를 통합해 궁리라고 했다.
궁리宮里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이 일대에 궁방전이 많아서 유래됐다. 궁방전은 궁실 운영비를 충당하는 토지로 조선후기에는 미간지의 개간을 통해 확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 뒤 건곤 뒤쪽에 복음촌과 중촌이 형성되면서 4개의 자연마을이 됐고, 1994년 이후 태평아파트와 영화블렌하임아파트가 준공되면서 마을 수가 늘었다. 궁리의 자연마을로는 궁안·건곤·복음촌·중촌이 있다.
궁1리의 자연지명은 ‘궁안’ 또는 ‘다루지’다. 궁안은 궁방전의 안쪽에 있어 유래된 지명이고 다루지는 다라고비진에서 유래됐다. 다라고비진은 진위천과 안성천의 합류지점인데다 서평택으로 건너가는 나루여서 교통의 요지였다. 다라고비진에는 일제강점기 국도 38호선이 건설되면서 다리가 놓였다. 처음에 목교木橋였던 다리는 장마와 수해에 자주 떠내려가 불편이 많았는데, 1938년 일제가 콘크리트로 궁안교를 가설했다. 궁1리는 해방 전에는 15∼20호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약 30호쯤 된다. 마을 규모가 커진 것은 해방 전후 진위천변습지 개간과 안성천 제방축조가 큰 역할을 했다.
궁2리의 자연지명은 ‘건곤乾坤’이다. 건곤은 ‘건궁리’에서 온 지명으로 약 200여 년 전 궁리 일대가 간척되면서 형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20호에 미치지 못했지만 해방후 인구가 증가해 현재는 80호가 넘는다. 마을을 개척한 사람들은 남원양梁씨와 남평문씨 였고 지池씨와 김씨가 뒤를 이었다. 초기 경작지는 국유미간지여서 궁실이나 권세가들의 수탈이 심했다. 만성적인 수해와 염해가 발생했으며, 진위천의 침식작용으로 어려움이 많아 1백여 년 전 노적도라고 불리던 구릉지대로 마을을 옮겼다. 현재 건곤마을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지만 상업인구나 회사원도 크게 늘었다. 천주교인들이 많은 건곤 마을에는 궁리성당이 있다. 궁리는 1920년대 중반 평택지역에서 가장 먼저 본당 성당을 건립할 계획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98년에야 평택성당에서 분리돼 본당으로 승격됐다.
궁3리의 자연지명은 ‘복음촌’이다. 복음촌은 한국전쟁 뒤 반공포로 일부와 경상도 빈농들과 주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개척했다. 초기 개척민들은 1960년대 초 문곡 4리 신흥동 간척사업을 위해 이거했고 일부 인구가 유입됐다. 38호 내외이며 농업인구보다는 회사원이 더 많다. 궁3리는 고덕국제신도시개발지역에 포함됐다. 조만간 마을이 폐동되고 주민들은 흩어질 것이다.
궁4리의 자연지명은 ‘중촌’이다. 중촌은 본래 야산과 밭이 많았고 민가는 거의 없었다. 한국전쟁 뒤 태평아파트 터에 있었던 반공포로들의 정착지가 재일교포에게 매각되는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이 중촌에 정착했다. 행정적으로 오랫동안 궁2리에 속해있다가 1995년 궁4리로 독립했다. 호 수는 42호로 복음촌보다 조금 크며 농업·축산업·양계업을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궁리에는 태평아파트와 영화블렌하임아파트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궁5·6·7리로 분류된다.
| 궁논들과 궁리 태평아파트 주변(2006) |
| 다라고비진이 있었던 진위천 제방과 다루지마을(2008) |
주석
64) 이근학(80세), 2007년 7월 궁2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