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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곡리文谷里71)
고려시대에는 종덕장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수원부 종덕면 지역이었다. 1914년 황조곡과 신기를 병합해 문곡리라고 했다. 문곡리 자연마을은 황조곡(1리)·원문곡(2리)·문신기(3리)·신흥동(4리)이다.
문곡1리의 자연지명은 ‘황조곡’ 또는 ‘황새울’이다. 황새울은 마을 입구 솔밭머리에 황새가 날아들어 유래됐다. 마을규모는 70여 호戶이며 달성서씨가 대성大姓이다. 농업이 발달했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축산업이 발달했다. 일찍부터 천주교를 수용했다. 시기적으로는 120∼130년 전쯤으로 짐작되며 오래 전 달성서씨 집안의 묘를 이장할 때 항아리에서 각종 성물이 출토됐다고 한다. 전체 주민의 60∼70%가 천주교인이었지만 현재는 많이 줄었다. 해방 전후에는 천도교 신도도 4∼5호가 됐다.
문곡2리의 자연지명은 ‘원문곡’이라고 하지만 작은 마을 단위로는 ‘구렁머리’와 ‘민곶(양지편)’으로 구분된다. 구렁머리는 마을 뒷산 모양이 구렁이 같은데 머리 부분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민곶은 옛날 바닷물이 유입됐던 시기에 지형이 밋밋한 곳에 곶串이 형성돼서 유래됐다. 양지편은 1789년 편찬된 호구총수에 나오는 오래된 지명이다. 마을 규모는 50여 호다. 마을을 개척한 것은 김해김씨이며, 300여 년 전 해주오씨와 김해허씨가 입향해 터를 잡았다. 전형적인 논농사 지대다.
문곡3리의 자연지명은 ‘문신기’다. 문신기는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문곡리 새터 또는 개미새터라고도 부른다. 개미새터라는 이름은 동청1리 개미마을에 거주하던 경주 이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조성하면서 유래됐다. 40∼50년 전에는 70세대, 현재는 55호 79세대다. 논농사 위주며 축산농가도 5호나 된다.
문곡4리의 자연지명은 신흥동이다. 신흥동은 1956년 신흥동과 개미새터 사이 피란민들에 의해 간척되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간척 주체는 파주 피란민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흥동에서 개미사이의 간석지를 간척해 경제기반으로 삼았다.
| 천주교신자들이 많은 문곡1리 황조곡(2007) |
주석
71) 주태수(52세, 문곡2리 이장), 김하섭(67세), 이경섭(69세), 문곡1리 천주교 공소 앞에서 인터뷰
박기용(74세), 이병국(49세, 문곡4리 이장) 2007년 문곡4리 마을회관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