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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습소講習所14)
조선총독부는 일본어를 보급시키기 위해 각 지역에 ‘국어강습소’ 또는 ‘국어야학’ 설치를 권장하고 지원했다. 당시 평택군은 1911년 ‘국어야학교’를 설치하고 학생 30여 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선각자 및 유지들은 강습소·서당·야학·학원·사숙 등을 설립했다.
강습소는 국어(일본어)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선어·한문·산술·일반상식 등을 함께 교육시켜 문맹퇴치와 공립교육기관의 부족에서 오는 교육난·입학난 해소에 큰 역할을 했다.
● 청북靑北국어강습소
1911년 청북면에서 유지들의 의견을 모아 ‘국어강습소’를 설립하고 국어 및 각 과목을 가르쳤다. 학생 수는 60여 명에 달했다.
● 포승浦升국어강습소
1917년 3월 1일 진위군 포승면장 최광식의 발기로 설립하고 학감 이흥서·박승열과 교사 최기승이 열성적으로 교육했다.
● 한문사숙漢文私塾
1917년 현덕면과 포승면의 유지들이 ‘한문사숙’을 폐지하고 강습소 5곳을 설립해 한문·국어·산술 등을 가르쳤다.
● 회화檜花강습소
1920년 서탄면 회화리에 황모黃某씨와 최기환이 4년제 학원인 ‘회화강습소’를 설립했다.
수료한 학생들이 진위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해 서울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등 상당한 교육성과를 올렸다. 1930년 ‘서탄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자 회화강습소는 폐소 됐다.
● 은평恩平강습소
1922년 8월 병남면 평택리 장로교회에서 ‘은평강습소’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60여 명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다. 운영경비 충당을 위해 1923년 3월 음악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24년 3월 부인들을 위한 여성계 교육기관이 없어 부인 야학을 개설했다. 부인 학생들을 모집해 동년 3월 24일 개학식을 거행했다.
● 일신一新강습소
1923년 2월 양재근이 청북면 율북리에 ‘일신강습소’를 설립하고 같은 해 6월 16일 교실을 새로 건축했다.
● 팽성학관彭城學館
1923년 4월 진위군 서면 함정리 황학열이 ‘팽성학관’을 설립했다. 당시 7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했고, 서면 도두리 남덕지·정운성·민영란 등이 도와 신축교실 16칸을 지었다.
● 진명강습소進明講習所
1923년 9월 7일 진위군 청북면 덕우리 유지 이강세·이기수·이강석 3인이 ‘진명강습소’를 개설 운영했다. 당시 학생들은 약 50여 명이 됐다.
● 신왕리新旺里강습소
1923년 10월 진위군 현덕면 ‘신왕리강습소’ 교사 유인柳寅은 강습소 내에 일반노동자들을 상대로 야학부를 설치했다. 야학부는 신왕리에 거주하는 일반 노동자 대상으로 보통상식을 가르쳤다.
● 진서振西강습소
1924년 4월 서탄면장 이필성의 발기로 1,000원의 예산을 세운 후 서탄면 회화리에 ‘진서 강습소’를 설립했다. 같은 해 4월 10일부터 교실 17칸을 건축하고 모집된 학생은 80여 명에 이르렀다.
● 도청棹靑강습소
1927년 12월 1일 정운봉이 중심이 돼 서면 도두리 청년들이 자금과 노동력을 제공해 설립한 도청강습소(棹頭里 靑年이라는 뜻)가 4년제로 설립됐다. 원장 정운봉을 포함한 3명 선생이 문맹퇴치에 노력했다. 해방 후 도청강습소는 팽성 제2국민학교 분교실이 됐다. 이후 분교실이 모체가 돼 계성국민학교가 설립됐다.
● 대추리大秋里강습소
1928년 7월 박동희외 4명이 서면 대추리에 ‘대추리강습소’를 설립했다. 당시 학생 수는 45명이었다.
● 문자보급반
1931년 3월 1일 청북면 어소리의 김어기·김영철·김진원·김계기 등 청년들이 ‘문자보급반’을 설치했다. 야간은 운영하지 않고 오전 9시부터 3시간씩 50여 명을 교육했다.
● 덕목德睦강습소
1933년 11월 29일 현덕면 덕목리 박성훈이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강습소를 설립했다.
● 율북栗北강습소
1935년 청북면 율북리 양창석·박필훈이 ‘율북강습소’를 설립했다. 해방 후 박상희가 강습소 위치를 어연리로 옮겼다. 이후 청북국민학교 분교실이 됐다가 1949년 박상희의 노력으로 ‘어연초등학교’로 승격됐다.
● 가재리佳才里강습소
1936년 송탄면 가재리 최남순이 자신의 토지에 교실을 짓고 ‘가재리강습소’를 설립했다. 해방 후 서정리국민학교 분교실이 됐고 ‘송탄초등학교’로 승격됐다.
● 지산리芝山里강습소
1937년 송탄면 지산리에 ‘지산리강습소’가 설립됐다. 교사는 어성룡魚成龍과 후일 현종관玄鍾寬이 맡았다.
● 덕우리德佑里강습소
1937년 청북면 덕우리 이강훈李康勳이 당시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5년을 졸업하고 고향인 덕우리에서 부인 오유순과 함께 ‘덕우강습소’를 설치해 덕우리·옥길리·용성리·수촌리 마을 70여 명의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 덕우리강습소의 학동들과 배움터(1942, 중앙이 오유순 선생) |
● 창내리倉內里강습소
일제말기 오성면 창내리 주민들은 안중국민학교까지 거리가 10km로 너무 멀어 자금을 모아 ‘창내강습소’를 설립됐다. 교사는 이근우李根祐가 있었다.
● 내기內基강습소와 서당
포승면 방림리의 윗 살치미에 당시 포승면서기 이인헌이, 아래 살치미에 이민영이 강습소를 세웠다. 내기리 승학동에 오관영이 서당을 세웠다. 국악명인인 지영희池瑛熙도 내기 강습소에서 수학하고 1928년 졸업했다.
● 옹포瓮浦강습소
일제 말엽 향남면 구문천리와 청북면 삼계리 옹포 마을에 강습소가 개설됐다.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 창고와 사무실이 있어 옹포강습소를 동척사무실로 옮겼다. 청북국민학교 분교실로 있다가 1955년 ‘삼덕국민학교’로 승격됐다.
● 양교리梁橋里 한문서당
양교리의 고렴 마을에 이창헌이 운영하는 한문서당이 있었고, 양교리 황로식도 강습소를 설립했다.
● 기타 지역
진위면 마산리 안우상·최영화, 봉남리 김기익, 고덕면 동창리 유기석, 해창리 김형태도 각기 서당을 차리고 훈장을 했다.
주석
14) ① 김명자, 앞의 책, pp.90~94.
② 청북교육문화사편찬위원회, 『청북교육문화사』, 2009, pp.121~125.
③ 평택군지편찬위원회, 앞의 책, pp.807~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