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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육기관(진위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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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진위지역에 교육기관이 있었을 듯 하나 흔적은 없다. 942년(고려태조 25)에 창건됐다는 만기사가 진위현 동천리에 소재하면서 호국불교 정책에 힘입어 진위지역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택지역 교육기관으로 조선 초 건립된 팽성읍 객사리와 진위면 봉남리 두 곳에 설치된 향교는 지방 교육기관과 지역의 정신적인 중심역할을 했다.


● 진위공립소학교16)

1895년 7월 19일 공포된 대한제국 ‘소학교령’에 의해 평택지역 최초 소학교가 설립 인가된 것은 1898년이다. ‘소학교령’ 제16조와 17조의 학령 및 취학에 관한 내용에 “만 7세부터 만 15세까지의 8개년을 학령으로 하고, 각 부·군은 그 관내의 학령아동을 취학시킬 공립소학교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
1899년 2월 1일 진위군 현내면에 3년제 학교인 ‘진위공립소학교振威公立小學校’가 설립인가를 받고 1900년 4월 7일 개교했다. 1900년 진위군 봉남리에 사립학교를 설치하고 정부에 교원敎員과 서칙書則을 청원했다.
‘관보 1256호(광무3년 : 1899년 4월 14일자)’에 평택 진위공립소학교의 최초 한국인 교원은 이교홍이다. 이교홍이 ‘진위군 공립소학교 교원, 서판임관 6등’으로 발령된 날짜로 추정하면 1899년 2월 학교가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4년까지 진위공립소학교 교원으로 신구완申龜完·김동진金東珍·김도묵金道黙·박형철朴馨哲·박병덕朴秉德·유운혁柳運赫·조동익趙東翊·최달구崔達求·김동욱金東旭·원후일元厚一·윤병순尹秉純·김현구金顯龜·윤대선尹大善 등이 임명됐다. 이중 윤대선尹大善은 1919년 3·1운동에 평택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교사가 없어 군청 내 객사·문묘 등에서 수업하다가 1906년 ‘보통학교령’에 의해 ‘을종공립진위보통학교’로 개칭하고 1911년 신 교육령에 따라 운영돼 오늘의 ‘진위초등학 교’가 됐다.17)


| 진위공립소학교 최초의 교사발령 관보18) |


● 공립진위보통학교18)

1906년 ‘보통학교령’에 따라 진위공립소학교를 ‘공립진위보통학교’로 개명했다. 수업연한도 5∼6년이 4년으로 단축됐고 일제는 친일교육을 강화했다. 교사의 관명을 ‘훈도’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일본인 훈도를 교감으로 겸임 발령해 일어를 가르치며 일반 교수법 지도와 학교관리를 맡게 했다.
당시 공립진위보통학교 교원으로 1908년 융희 2년 1월 28일 교원 정범시가 본과 훈도 판임관 3등으로 임명됐으며 부교원 이필선이 부훈도 판임관 5등으로 임명됐다.


● 진위공립보통학교19)

1911년 8월 22일 전문 30조로 된 ‘제1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됨에 따라 1911년 9월 1일 교명을 ‘진위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전 교원을 신 학칙에 의거 임용했다.
진위공립보통학교는 정부보조가 없어 군수와 도민 협조로 운영했으며, 교육시설이 미비하고 정식교사가 부족해 정상적인 교육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가정의 자녀들만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수업료를 내지 못해 340명의 학생이 퇴학을 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20)
오래된 생활기록부 원본에 1911년 4학년 졸업생 이용옥은 당시 나이가 14살이었으며, 입학 전에 관립 ‘미동보통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과목은 수신·국어·한문·조선어·산술·지리·역사·도화·체조·창가 등을 배웠고, 학생들은 주로 보통학교 입학 전에 서당·사숙·사립이나 관립학교를 다니던 학생으로 현재 취학 연령보다 4∼5살 정도 많았다. 성적 평가는 총점·평균·석차 등으로 기록했고 신체발달 상황이나 출석 일수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21)
당시 교육내용은 일어를 국어로, ‘조선어 및 한문’을 제외한 전 교과를 일본어로 편찬해 사용했다. 당시 식민지교육 기본정책은 식민지의 경제적 수탈과 근로착취에 이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실무교육이었다. 1914년 3월 ‘진위공립농업학교’가 부설돼, 1918년 3월 23일까지 5년간 2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다가 폐교됐다.
진위공립보통학교는 진위지역은 물론 오산·용인 등 지역 학생들도 통학했으며, 학생들 중에는 나이 많은 학생도 상당수 있었다.
1911년 11월경 학교를 다시 봉남리 진위군청 내 객사로 이전하게 됐다. 1913년 지금 위치에 20평 규모의 목조 단층교사를 신축 이전해 개교 이래 13년 만에 학교시설을 갖춘 독립된 교사를 마련했다.


| 진위공립국민학교 제31회 졸업사진(1943) |


| 진위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2000.4.23) |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문화정치文化政治가 시작되고 1923년 4월 1일 전문 26조와 부칙으로 ‘제2차 조선교육령’이 개정 공포됐다. 제2차 조선교육령 제5조에 의 거 진위공립보통학교는 수업 연한이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돼 1924학년도에는 졸업생이 배출되지 않았다. 당시 졸업생수는 15명에서 25명 정도였으며 1925년에 처음으로 여학생이 8명 졸업했고 6년제 졸업생 13명이 배출됐다. 학생 수 증가로 교실이 부족해 1928년 3교실 75평을 증축하고 1930년 다시 4교실 100평을 증축 했다.
최초의 공립교육기관으로 진위학교의 역사와 변천은 평택교육의 역사를 입증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 진위백년사 |



[진위초등학교 시대별 학교명 변천사]22)


학교명 기간
진위공립소학교 1900. 4. 7~1906. 8. 31
공립진위보통학교 1906. 9. 1~1911. 11. 3
진위공립보통학교 1911. 11. 4~1938. 3. 31
진위공립심상소학교 1938. 4. 1~1941. 3. 31
진위공립초등학교 1941. 4. 1~1950. 6. 1
진위국민학교 1950. 6. 2~1996. 2. 28
진위초등학교 1996. 3. 1~현재


2000년 4월 21일 진위초등학교는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하고 『진위백년사』 기념책자를 발행했다.



주석

16) 진위백년사편찬위원회, 『진위백년사』, 2000, p212.
17) 제1235호: 광무3년(1899년) 4월 14일
18) 진위초등학교백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251. 
19) 진위초등학교백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251.
20) 1932년 10월 22일자 언론기사
21) 평택교육사편찬위원회, 『평택교육사』, 2005.
22) 진위초등학교백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364~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