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새마을 성공사례 > 역사

본문 바로가기
역사 > 현대 >현대사회와 평택의 변화 >새마을운동 >농촌 새마을 성공사례
■ 농촌 새마을 성공사례

본문

칠원리 마을 새마을운동


마을길을 정비하고 있는 칠원리 주민들

| 마을길을 정비하고 있는 칠원리 주민들 |


칠원마을은 조선시대 삼남대로 중 경기·충청권역에서 역참이 있었던 마을로 본래 ‘갈원’이라 했다. 진위읍치에서 백원현(흰치고개)을 넘어 평택으로 가는 길목에 주막이 형성된 곳으로 상업은 발달했으나 산간지역이라 농업은 미천한 부락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경부국도와 경부선 철도가 생겨 주요 교통로에서 빗겨감에 따라 마을이 피폐해졌다.
칠원리 태생으로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김기호(1934년생)와 이충웅(1936년생) 등 50여 명은 1948년 칠원리 소년단을 만들었다. 단원들은 마을을 바꾸어보자는 마음으로 추수 끝난 들판에서 보리이삭줍기 운동을 했다. 이 운동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마을의 관혼상제에 필요한 도구들을 마련(1959년∼1964년)했다. 협동하는 주민 의식이 있었으며 성인 야학을 만들어 문맹퇴치에도 나섰다.
1964년 청년단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청년회 기금으로 주변 야산을 녹화(국유림 115정보-34만 평)하고 감시·감독해 5년 후 푸른 산림으로 만들었다. 칠원리 청년회가 관리한 칠원리 산림계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청년단 단장이었던 김기호가 1972년 3·1문화상을 받았다. 당시 김기호는 산사태 없는 마을을 이룩한 조림 왕으로 소개됐으며 상금 50만 원은 마을회관 건립에 사용됐다.
1971년 전국적으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칠원마을은 김기호 지도자를 중심으로 새마을운동에 적극 동참해 산림녹화, 우물개수, 마을공동 경작지사업, 약초재배, 특용작물재배, 농로개설 사업, 낙농사업 등을 했다. 1972년 3월 김기호는 농로로 편입될 자신의 소유전답 300평을 희사했으며 주변 토지주들과 합의해 40여 일 만에 5m폭의 농로를 3.5km나 개설했다. 또 마을 진입로 1.5km를 6m폭으로 확장하고 수양버들과 포플러 2,000그루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했다.
1973년 10월 39호 지붕개량 및 28동의 불량주택 개량을 완료했다. 축산구조 사업비를 지원받아 4동의 축사를 건립하고 융자금 396만 원으로 평택목장에서 네덜란드산 홀스타인 젖소 12두를 구입해 우선적으로 4농가에 입식시켰다. 이후 3년 만에 낙농가 17호 114두로 늘어난 낙농마을이 됐다. 환경정비는 변소·축사·퇴비사·부속사 등을 개량해 보건 위생 시범마을이 됐다. 또한 지원금 120만 원과 마을기금 155만 원, 주민 부담을 더해 전 기사업을 완료함으로써 야간작업이 용이해져 소득증대에 도움이 됐다. 전기가 들어오자 간이 급수시설 운영, 부엌개량, 위생식수 공급이 가능해져서 근대적 복지문화 생활이 시작 됐다. 공동 양묘養苗사업을 통한 소득으로 식생활개선, 공동취사장(7평) 설치 등을 통해 보 건위생 선도마을이 됐다.
1976년 김기호 지도자가 새마을 협동장을 받았으며, 칠원리 마을은 우수마을로 지정돼 표 창을 받았고 같은 해 내무부 선정 외국인 홍보마을이 됐다. 1987년 이충웅 씨(칠원리 새마 을운동의 주역-이장역임, 새마을 지도자)가 새마을 훈장 노력장을 받아 지속적인 새마을운 동 모범마을로 명성을 지켰다.



서탄면 사리 새마을운동


새마을지도자 김기호 씨가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 훈장을 수여받는 모습(1976년 9월 7일)

| 새마을지도자 김기호 씨가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 훈장을 수여받는 모습(1976년 9월 7일) |


서탄면 사리는 평택시 북단에 위치하고 오산시와 인접한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 오산 천이 남으로 흘러 진위천에 합류하는 고장이다. 서탄면에는 1981년 새마을 훈장 노력장을 수상한 최정희 씨의 성공사례가 있다.
호당 0.5ha에 못 미치는 소작농으로 영세한 빈농촌락이었던 이 마을에 시집온 최정희 씨는 1972년 국가적으로 나무심기 운동이 전개되고 마을 뒷산 조림사업(리·동별 산림계 조직), 마을 앞 유실수단지 조성, 외곽 연료림, 용재림 조성 등이 전개되자 새마을부녀회 를 조직해 묘포苗圃경영을 계획하고 부녀회원들과 함께 나섰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하고 자금·기술·공동묘포전 등이 모자랐다.
최정희 씨는 자신 소유의 밭 1,000평을 희사해 묘본 구입자금을 마련했으나 1974년 출 하한 묘목은 300만 원의 적자를 보고 남편마저 병으로 잃었다. 그러나 당시 내무부장관 김형옥의 관심과 각계의 성원 및 지원으로 다시 묘전을 일구었 고 1976년 7종의 묘목을 출하해 500 만 원의 수익을 냈다. 수익금으로 마을 106호의 재래식부엌 개량, 화장실 개 조, 마을 공동구판장 개설, 어린이 놀 이터 조성 등 문화농촌으로 바꾸어 여 성 지도자들의 모범이 되었고 서탄면은 새마을운동 홍보마을이 됐다.



현덕면 신왕리 새마을운동


취로사업중인 신왕2리 주민들(1979)

| 취로사업중인 신왕2리 주민들(1979) |


현덕면 남쪽 아산만과 인접한 이 마을은 작은 어촌이었고 호당 농경지는 0.3ha에 불과했다. 1972년 당시 60세였던 새마을 지도자 김원기 씨가 마을의 의식개혁에 앞장섰으며 협동하는 마을로 만들었다.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자 어업 의존에서 벗어나 하천 경지개간을 통해 관개농업의 계기를 만들었다.
1978년 주민 공동으로 소하천 개수를 통해 홍수를 예방했고, 마을 진입로 2km를 폭 6m로 만들었다. 또 마을금고를 개설 해 소액투자 유도, 농자금유통에 기여했다. 자비로 마을회관 15평을 마련했고 1979년 공동창고 25평 건립에 성공했다. 마을을 번창시킨 공로로 1982년에 새마을훈장 노력장이 수여됐다.





(김용겸_평택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참고문헌]


『송탄시사』, 송탄문화원. 1994.

『팽성읍지』, 평택문화원. 2010.

『안성읍지』.

『진위면지』, 평택문화원, 1999.

『평택시군통합사』.

『국가기록원 연표와 기록 1950년대 수집목록』.

『평택군지』, 평택문화원, 1984.

『송탄시사』, 송탄문화원, 1990.

『기록으로 보는 생활사』, 국가기록원, 2007.

김영미, 『그들의 새마을운동』, 푸른역사연구소, 2003.

『평택군통계연보』, 1971∼2000.

『송탄시통계연보』, 1985∼1990.

『새마을운동 40년사』, 내무부교수협의회.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