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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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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와리老瓦里


노와리는 팽성읍의 동쪽 끝 마을이다. 조선후기 평택현 동면東面이었다. 1914년 노련동과 와야리, 직산군 섬서면 와우리를 통합해 노련동의 ‘노’와 와야리의 ‘와’를 취해 노와리로 했다. 노와리에는 4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4개 마을의 인구는 18세기 중엽에 여지도서가 편찬될 때만 해도 노련동에 24호, 와곡에 비슷한 수가 거주했다. 주변지역이 간척되면서 해방 전후에는 동면에만 100여 호, 왜골에 50여 호가 살았다. 양천마을은 1946년 이주할 때는 25호였지만 점차 증가해 현재는 35호다. 피란민촌(장단수용소)은 1955년 서울 수색동에서 집단 이주할 때 약 50호가 이주했는데 현재는 53호로 증가했다. 2008년 노와리는 4개 마을에 300여 세대, 700여 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2010년 경 노와4리 옆에 대추리 이주단지가 조성되면서 인구가 늘었다.


노와1리 동면東面은 노와리의 중심마을이다. 동면은 현재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지만 여지도서가 쓰여진 18세기 중반에는 24호였다. 마을은 해발 20∼30미터가 안 되는 낮은 구릉지대에 자리 잡았으며 동북쪽으로는 안성천 남쪽으로 너른 평궁리들이 펼쳐있다. 중심마을이어서 전에는 초등학교(노와분교)도 있었고, 교회와 공공시설이 있었다.


노와2리는 왜골이다. 왜골은 직산왯골(성환읍 와룡1리)과 평택왯골(노와2리)로 나뉘어진다. 17세기 말에 편찬된 팽성지에 따르면 평택현 동면에는 와야동이 있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이 왜골이 된 것으로 보인다. 노와3리 양천마을5)은 평궁리 상평마을에서 이주했다. 처음에는 한두 집씩 옮기기 시작해 나중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주했다.


노와4리는 피란민촌이어서 ‘포막’ 또는 ‘수용소’라고 불렀다. 이들은 본래 경기도 장단과 파주사람들이었다. 전쟁 당시에는 서울 수색동에 정착했다가 1955년 노와리로 집단 이주했다. 초기 이주민은 약 50여 호였다. 황무지 개간과 동고리 일대 간척으로 경제기반을 삼았다. 2010년 노와4리 옆에는 대추리 마을이 조성됐다. 대추리는 본래 캠프 험프리스 (K-6)미군기지 안에 있었으나 1952년에 곤지나루터 옆으로 강제 이주당했고, 2007년에는 미군기지 확장으로 또다시 쫓겨났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이전반대투쟁을 계속했지만 결국 보상을 받은 후 끝까지 남아 있던 46호만 새로운 마을을 조성해 집단 이주했다.



옛 평택현 동면의 중심지였던 노와1리 동면마을(2008)

| 옛 평택현 동면의 중심지였던 노와1리 동면마을(2008) |



주석

5) 이수연(86세), 2003년 5월 16일 마을 안길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