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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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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리咸井里24)


함정리는 조선후기 평택현 경정리 지역이다. 함정1리·함정2리·본정2리·신대4리 전체를 영역으로 했던 경정리에는 서원말·함풍촌 같은 자연마을이 있었다. 1914년 함풍촌과 경정리에서 한 글자씩 빌려와 함정리라고 했다.


함정리는 함정1리 서원말, 함정2리 말랭이로 형성됐다. 서원말의 형성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화포 홍익한의 묘와 포의서원 터가 마을 안에 있어 조선후기에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서원말이라는 지명도 ‘포의서원’에서 왔다. 서원말은 ‘선말’이라고도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포의동’이라고도 했다. 포의사 옆에는 16세기 사림파학자였던 우남양을 배향했던 운곡사와 삼정사를 배향했던 향현사도 있었다.


1952년 캠프 험프리스(K-6) 미군기지가 건설되면서 본정2리 아리랑고개 쪽으로 후문이 만들어졌다. 후문으로는 미군들과 한국인 노무자, 군속들이 드나들었다. 미군들이 드나들면서 기지촌이 형성됐다. 기지촌은 미군기지 후문에서 본정농협방향에도 있었지만 함정1리·도두1리 등 주변마을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함정1리는 기지촌이 번성할 때 최대 200호가 넘었다. 주민들은 농업과 회사원이 반반이었다. 1980년대 중반 본정2리 아리랑고개가 분동되고 미군기지에 다니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90호 정도로 축소됐고, 근래 미군기지 확장사업으로 경작지를 상실한 주민들이 이거하면서 현재는 50, 60호 남짓된다.


함정2리 말랭이는 피란민과 1960년대 이후 충청도 일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본래는 신대4리 말랭이와 같은 마을이었고 127호나 됐지만 나중에 분동되면서 함정2리에는 65호만 남았다. 말랭이 언덕배기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일제 말 강제이주 당했던 서원말 사람들이었다. 해방 후 대부분 옛 마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모여들면서 마을규모가 커졌다.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10여 호에 불과했던 마을이 1950년대 후반에는 30호가 됐다. 1960∼70년대 도두리벌 흑무개들·암기원들이 불하되자 충청도 공주, 청양 등 전국의 빈농들이 몰려들어 전체 마을이 100호가 넘게 됐다.



포의서원이 있었던 함정1리 서원말

| 포의서원이 있었던 함정1리 서원말 |



주석

24) 이용근(68세), 2003년 함정1리 이용근씨 댁에서 인터뷰
      김영주(53세), 함정1리 마을이장, 2009년 1월 25일 전화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