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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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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해리城海里30)


성해리는 갑오개혁 뒤 수원군이었고, 1914년 진위군 포승면 석정리에 통합됐다. 1986년 안중출장소가 설치되고 1989년 안중면이 독립되면서 성외(밖)와 해조마을이 분동돼 성해 리가 됐다. 성해리의 자연마을로는 성외(1리)와 해조(2리)가 있다. 성해1리 성외의 자연지 명은 ‘성바께’로 석정리 장성의 바깥쪽에 있어 유래됐다. 분동되기 전에는 23호에 불과했 다. 마을은 능선주위에 넓게 흩어졌으며 주로 밭농사와 논농사로 생계를 이었다. 1990년 대 이후 석정리 방면으로 석정빌라가 들어서고 국도 38호선 길옆에 상가와 건물들이 들어 서면서 세대 수가 증가했다.


성해2리 해조는 남양만 바닷물의 상한선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해조에는 은성·너머각골·까치당골·성뚝과 같은 크고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의 대성大姓은 경주이씨 익재공파다. 경주이씨는 350여 년 경에 입향했다고 전해진다. 해방 전에는 36호가 살았다가 한국전쟁 뒤 황해도 연백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1960년 전후 연백사업장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 조금 더 증가했다. 젊은 인구가 도시로 이거하고 노령인구가 증가하면서 현재는 40여 호만 남았다.


은성삼거리는 근대 이전 포승읍 만호리 대진과 안중장과 수원, 평택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 길은 근대 이전에도 포승읍 만호리 대진大津에서 안중장으로 나가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서산·태안·당진에서 안중장을 보러 오는 상인들이나 소장수들이 소떼를 끌고 넘어왔고, 안중장에서 소를 구입한 사람들도 이곳을 지났다. 은성주막이 많을 때는 10여 개나 됐다. 주막에서는 숙식이 가능하며 술과 밥을 팔았고 술시중을 드는 기녀들도 있었다. 주막은 해방 뒤 대중교통이 발달하면서 쇠퇴했다.



주석

30) 성해1리 : 이경희(이장), 2010년 1월 18일 전화로 인터뷰
성해2리 : 임규문(74세, 노인회장), 이상훈(83세), 이상곤(87세), 김칠성(77세), 2010년 1월 12일 성해2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