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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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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만호리晩湖里40)


조선시대 직산현 외야곶면 지역이다. 갑오개혁 뒤 수원군에 통합됐고, 1914년 만포晩浦·안외면 만호리 일부·원촌院村·유곡을 통합해 진위군 포승면 만호리라고 했다. 만호리라는 이름은 조선 초 수군첨사를 설치하면서 유래됐다. 당시 수군첨사를 도만호라고 불렀고 후에는 수군만호로 격하돼 세조 때까지 유지됐다.


만호리는 포구마을이다. 포구는 만호5리 솔개바위 마을에 있었다. 대동여지도 등 여러 고지도에는 대진大津·한진漢津·대진포大津浦라고 표기돼 있다. 1872년 조선방역지도에 대진은 삼국시대 백제의 수군창이 있었고, 통일신라 때에는 당나라와 신라의 사신과 상인들이 오가던 해로교통의 요지였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중국 교역항으로의 역할은 중단됐지만 서산·당진·태안 등 내포지역 사람과 물산을 교역하던 대표적인 포구였다.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대진大津은 수원부 서남쪽 1백 리이며 넓이가 10여 리인데 조세潮勢가 사납다…만조滿潮 때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라 기록했다.


만호리의 자연마을은 상만호(윗느지,1리)·하만호(아랫느지, 2리)·대정(3리)·원터(4리)·연암(솔개바위, 5리)이 있고, 만도 아파트와 천오애 아파트는 만호6리와 만호7리다. 개발 전에는 유곡(놀코지)이라는 마을도 있었지만 폐동됐다. 만호1∼2리 상만호와 하만호의 자연지명은 ‘느지’다. 느지는 곶이 발달해 바닷물이 호수를 이룬 지형을 말한다.


두 마을은 본래 같은 마을이었다. 규모도 해방 전후에는 30∼40호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86년 3월과 5월 만도기계, 한라공조 평택공장이 입주하고 1986년 평택항이 개항하면서 상만호(윗느지)가 33호, 하만호(아랫느지)가 22호로 커졌다.


만호3리 대정大井의 자연지명은 ‘큰우물’이다. 바닷가에 있어 수질 좋은 물이 귀했던 시절, 마을 안 서낭당 옆에는 큰우물이 있었다. 대정마을 주민들은 큰우물을 자랑으로 여겼다. 주변 마을들도 다른 특성을 제쳐두고 마을이름을 큰우물로 불렀다. 큰우물은 해방 전후만 해도 15∼16호의 작은 마을이었다. 2000년경 우회도로가 건설되면서 두 토막이 났다. 원터(4리)는 포승공단에 인접해 있다. 상주황씨들이 대성大姓을 이루었고 25호 내외의 작고 아담한 마을이었다. 포승국가공단이 들어서면서 일부가 잘려나갔고, 2013년 공단확장과 택지개발사업으로 폐동됐다. 원터라는 지명은 조선전기 수군만호영이 있어 유래됐다. 만호5리 연암은 우리말로 솔개바위다. 마을 북서쪽 산기슭에 솔개처럼 생긴 바위가 지명으로 굳어졌다. 솔개바위는 포구마을이다. 마을 규모는 80여 호쯤 되는데 해방 전에도 가장 큰 마을이었다. 솔개바위에서 들물횟집을 끼고 북쪽 산기슭을 돌아가면 놀코지遊谷가 있었다. 놀코지에는 조그만 흰모래해변과 벼락바위·새바탕 같은 기암괴석이 있어 유원지가 형성됐고 상가와 주막이 있었다.


만호리 여러 마을들은 성씨가 다양하지만 느지에는 용인이씨·전주이씨가 대성大姓이고, 원터에는 상주황씨가 많다. 아랫느지는 전주이씨 무산군파의 동족마을이다. 느지는 바다와 인접해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유입됐다. 물살이 거세고 풍랑이 자주 일었으며 해일도 빈번했다. 지형적 조건 때문에 어업과 상업이 발달했지만 만 안쪽의 갯벌이 간척되면서 점차 반농半農 반어半漁 마을이 됐다. 솔개바위 마을은 어업이 주산업이었다. 느지와 원터는 농업, 일부는 어업을 했다.


대진大津이 서해안 물산 유통에 중요한 항구로 부상하면서 나루터에는 선창이 조성됐다. 솔개바위 마을 앞에 있었던 선창은 일제가 쌓았고, 산 밑으로는 해방 후에 쌓았다. 새로 쌓은 선창에는 나룻배가 오가고 봄·가을 성어기면 생선을 가득 실은 고깃배들이 몰려들었다. 타지에서 몰려든 고깃배들은 연안에서 조업하는 중선中船이 많았다. 중선들은 칠산 앞바다와 연평도에서 조기잡이를 하거나 고군산열도에서 새우잡이를 했다. 소규모 어선으로 근해에서 조업했던 만호리 사람은 주로 아산만의 숭어·강다리·꽃게를 잡았다. 사람과 소의 운송은 나룻배의 몫이었다. 나룻배는 한선이라고 하는 밑이 넓적한 평저선이었다. 충청도 내포의 소장수들은 한선에 소 10마리씩 실어 건너왔다. 풍족했던 어족자원은 1970년대 아산만과 삽교천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씨가 말랐다. 고기들이 산란장소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바지락에 밟혀 걷기 힘들던 갯벌도, 썰물에 갯가에 나가면 몇 자루씩 해오던 굴양식도 먹이가 줄어들면서 서서히 황폐해져갔다.


1990년대 평택항 확장공사가 본격화되고 1999년 해군제2함대 사령부가 옮겨오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어선이 드나들던 포구가 사라지고 어족자원이 고갈됐으며 주변지역이 개발되면서 고향을 떠나는 사람도 많아졌다. 봄·가을이면 어선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던 솔개바위도, 농업과 수산업으로 살아가던 느지도 영향 받기는 마찬가지다. 평택항이 건설되고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항만사업소에 취직도 했지만 오래 근무한 사람은 많지 않다.



만호1리 윗느지(2008)

| 만호1리 윗느지(2008) |



조선시대 대진이었던 만호5리(2013)

| 조선시대 대진이었던 만호5리(2013) |



평택항으로 개발되기 전 만호5리 선착장

| 평택항으로 개발되기 전 만호5리 선착장 |



주석

40) 이원길(72세), 2006년 만호4리 원터 마을 자택에서 인터뷰
      이정춘(54세, 이장), 이경칠(77세), 김창배(8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