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암리 > 마을

본문 바로가기
마을>평택의 마을>서탄면>서탄면의 자연마을>금암리
■ 금암리

본문

(1) 금암리金岩里54)


금암리는 서탄면의 면소재지다. 일제초기에는 금암1리 골안말에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가 있었는데 나중에 옮겨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파출소·송탄농협 서탄지소·서탄초등학교가 있다. 1930년 12월 서탄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서탄초등학교는 처음에는 4년제였다가 6년제로 승격됐다. 학교시설도 교실 3개에 사택 1동이었고 학생 수도 21명에 불과했다. 해방이 되면서 강습소에 다니던 학생들을 수용하고 1950년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규모가 확대됐다.


금암리金岩里라는 지명은 북바위 전설에서 유래됐다. 자연마을은 골안말(1리)·안말(2리)·새말(3리)로 형성됐다. 마을들은 1914년 이전만 해도 각각 독립된 마을이었다. 금암1리 ‘골안말’은 약 40호이며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골안말은 ‘고래말’로도 불린다. ‘고래’는 골짜기의 다른 이름이다. 금암2리 ‘안말’은 70호가 넘는다. 일제강점기에도 세 마을을 대표하는 구장(이장)이 안말에서 배출됐다. 은진송씨와 연안차씨가 많다. 금암3리 새말은 약 40호로 청주한씨가 많다. 충의공 한온(1517∼1555)의 후손이다.


금암리 남쪽 들판은 해정들이다. 해방 전후 금암리 일대의 대지주는 화성 용주사였다. 용주사가 금암리 일대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 해정들의 간척사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용주사의 토지경영도 동척농장이나 일본인 농장과 같이 마름을 통해 착취도 하고 소작권 박탈을 무기로 소작농을 억압했다.



금암리의 중심마을 금암2리 안말(2006)

| 금암리의 중심마을 금암2리 안말(2006) |



금암리의 기원이 된 북바위(2006)

| 금암리의 기원이 된 북바위(2006) |



주석

54) 한병식(69세), 한도희(69세), 2006년 8월 금암3리 마을에서 인터뷰
      차종만(72세), 차세종(64세), 2006년 8월 금암2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