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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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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리寺里55)


갑오개혁 뒤 진위군 이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진위군 서탄면 사리라고 했다. 사리의 자연지명은 ‘절골’이다. 옛날에는 사리마을 입구 은행나무 뒤쪽에 사찰이 있었다.


사리는 단일마을이다. 마을규모는 100호 120세대나 된다. 마을내력은 300∼400년이 넘었고, 안동김씨와 칠원윤씨가 대성大姓이다. 김씨와 윤씨가 입향하기 전에는 순흥안씨와 해주오씨가 세거했다고 한다. 교육열이 높고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 이 전통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으로 승화돼 3·1운동에 앞장서게 했다. 사리 3·1운동의 상징적 인물은 당시 서탄면장을 지냈던 윤기선과 윤교영이다. 윤기선은 조선 말 시종원 시종을 지내다가 일제강점기 서탄면장으로 있었다. 평택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각 마을 이장들에게 연통해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면사무소 앞에 모이게 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윤기선의 만세는 주변 마을을 자극해 금암리, 회화리, 수월암리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사리는 마을이 부유하고 주민들의 협동심이 남다르다. 사리마을의 협동심은 55년째 이어오는 사리이동협동조합·4H운동·새마을운동에서 나타났다. 이동협동조합은 1958년 시작된 이래 정미소운영·구판사업·저리대출사업 등을 통해 주민들의 자립과 이윤창출에 성공했다. 조합은 이윤의 일부를 조합원들에게 분배하고 나머지로 사리교 건설 등 마을공공사업에 투자했다. 이와 같은 운영으로 1970년 이동협동조합이 단위농업협동조합으로 통합될 때에도 살아남았다.



이동협동조합운동의 상징 사리마을(2007)

| 이동협동조합운동의 상징 사리마을(2007) |



주석

55) 김덕용(75세), 김찬희(73세), 오완근(78세), 김형인(78세), 2006년 1월 사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