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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성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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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렬尹英烈의 묘


소 재 지 : 팽성읍 객사리 산105



•현황 : 윤영렬(1843∼1939)의 본관은 해평이며,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의 무신, 군인, 정 치인이다.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의 동생이다. 대한민국 제1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윤 치영의 아버지이자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경기도지사를 지낸 윤원선의 할아버지다. 1878년(고종 15) 무과에 급제해 평안북도 강계방어사·내무참의·사헌부감찰을 지내고 대한제국에서 육군 참장과 자헌대부를 지냈다. 묘역은 노송수림을 보존하고 있는 부용 산에 있다.



홍익한洪翼漢의 묘


소 재 지 : 팽성읍 본정리 322



•현황 : 홍익한(1586~1637)의 묘는 처형 장소나 매장처가 확실치 않아, 그가 평소 타던 안마와 의금만을 수 습해 함정리(옛 경정리)에 장사지냈 다. 일제가 군사시설을 설치하면서 1942년 본정리 꽃산에 묘만 이장했 고 묘비·비석들은 그대로 버려져 있다가 1964년 현재의 위치로 비각 을 옮겼다. 1982년 비각 전부를 꽃 산의 홍학사묘 옆에 옮겨 놓았다.
홍익한은 초명은 홍습洪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찬성贊成 홍숙洪淑의 현손玄孫, 진사 홍이성洪以成의 아들로 백부인 교위校尉 홍대성洪大成에게 입양된 후 서울 마포에서 자랐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봉림대군·윤집·오달제와 함께 척화파로서 청나라에 끌려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죽임을 당한 ‘병자丙子 삼학사三學士’의 한사람이다.
묘소 앞에는 묘표와 문인석 2기가 있고, 묘역 전면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포의각이 있다. 홍익한 묘표는 2기가 있는데, 현재 묘소 앞에 세워진 것은 1689년(숙종 15) 만들어진 것으로 월두형 비신양식이다. 규모는 비신 48.5×17×127cm 이고, 비대는 87 × 57 × 29cm 로 외증손 심사성이 글을 쓴 것이다.
포의각내에 있는 묘표는 비신이 54 × 21.5 × 124cm, 비대는 106 × 82 × 24cm, 옥개석은 104 × 79 × 39cm으로 1831년(순조 31) 이의현이 찬한 것이다.
홍익한 묘갈은 1725년(영조 1)에 포의사가 전결을 획급 받을 때 1726년(영조 2)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송시열이 찬하고, 민진원이 전액하고, 이의현이 쓴 것으로 글씨가 마멸돼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비문의 23행 중 왼쪽 모서리가 깨어져 1행은 소멸됐다. 규모는 비신이 54.5 × 29 × 125cm이다.



| 홍익한 묘역 |



장우張羽의 묘


소 재 지 : 팽성읍 노양1리(계양)



•현황 : 장우의 호는 두촌杜村, 본관은 덕수이다. 아버지 장우윤은 고려 때 부랑을 지냈고, 조선개국 후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팽성읍 석근리로 이주해 덕수장씨의 중시조가 됐다.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자헌대부·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중 묘와 수호물, 묘갈이 없어졌으나 15세 종손인 장현근이 묘와 수호물을 찾았고 1920년 후손인 장세기가 묘갈을 다시 세웠다. 묘역에는 신도비, 망주석, 석상 등의 석물이 있다. 신도비의 규모는 비신이 50 × 23 × 136cm, 비대 94.5 × 63.1 × 41cm, 옥개석은 85 ×59.5 × 41cm 로 ‘조선국 형조판서 두촌장공신도비’朝鮮國 刑曹判書 杜村張公神道碑라고 장순규가 전액하고, 장익진이 글을 썼다.



| 장우 묘역 |



이효숙李孝叔의 묘


소 재 지 : 팽성읍 대사리 산168-1



•현황 : 이효숙(1440년~ 1487년)은 조선 정종 제10남 덕천군의 2남이며, 어머니는 이종 무의 딸이다. 배우자는 정부인 진주하씨( 1437~1474)로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원은 후손이 없고 후처인 숙부인 안동권씨(1454~1495)는 유검의 딸로 5남을 낳았다. 묘역에 묘갈과 신도비가 있다.



정담수鄭聃壽의 묘


소 재 지 : 팽성읍 근내리 산55(근내앞들)



•현황 : 정담수(1550~1604)는 무신 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에서 선봉장겸 응양장군으로 참전하면서, 영동부터 당항까지 수비하며 왜군 의 배를 30여 척이나 물리치는 전공 이 있어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절영 도시」 1수가 전해지며, 이순신의 「한 산도시」와 더불어 애송됐다고 한다. 정담수의 묘역은 오마산에 있고 무 덤에는 장군이 애용하던 칼 한 자루 가 묻혀 있다고 전하며 석수·망주석·묘표·묘갈이 있다. 묘갈은 1899년에 세운 것으 로 묘에서 약 5m 아래쪽에 있다. 신도비 또한 같은 시기에 세웠으며 묘갈 오른쪽 아래 에 서 있다. 마을에는 정담수를 기리는 충정사라는 사당이 있다.
묘갈 규모는 비신 53 × 30 × 108.5cm, 비대 104 × 76 × 33cm, 옥개석 96.5 × 66.5 × 39cm 으로 서정순이 글을 지었고, 김영의가 전액하고, 정태규가 글을 썼다. 묘표의 규모는 비신이 64 × 32 × 191cm, 비대가 138 × 98.5 × 40cm, 옥개석 131 × 93 × 42cm로 송근수가 글을 지었으며 이헌식이 글을 썼다.



| 정담수 묘역 |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