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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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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길상元吉常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안골



•현황 : 원길상(1759∼1818)은 효성이 지극해 13세에 모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고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했다. 계모를 극진히 모시고 예의가 바르기에 죽은 후 진위 유림이 조정에 청해 1894년(고종 31)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고 효자정문을 하사받았다. 본래의 정문은 낡아 없어지고 편액만 남아 원연·원사립의 양세충효정문兩世忠孝旌門에 옮겨 같이 보관하고 있다. 묘역에 최근 세운 묘표가 있다.



| 원길상 묘역 |



원균元均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산82



•현황 : 원릉군 원균(1540∼1597) 은 자는 평중平中이며 선무공신·숭 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 사·원릉군宣武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 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에 추증됐다. 묘 역은 임금이 녹훈 봉작 교서와 제문 을 내려 봉표치제 했다. 배는 파평 윤씨이다. 신도비 1기, 문인석 2기, 무인석 2기, 석등 1기, 묘비 2기가 서있고, 설화가 전해지는 애마총이 묘 아래쪽에 있다. 사당은 묘의 서북쪽에 있다.



| 원릉군 원균 묘역 |



원사립元士立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산79(안골)



•현황 : 원사립(1569∼1610)은 자는 현경顯卿으로 원연의 차남이며 원연 의 동생인 원전에 양자 입적했다. 1597년 원사립의 부친 원전이 경상 도 수군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해 부친상을 당했으나 왜적을 토벌하러 나가게 됐다. 서천군수 재직시 전투 를 수행했다. 진주목사와 김해부사를 거쳐 통정 대부에 오르고 만포방어사와 평안도 병마절제사를 지낸 뒤 귀향해 부친상을 지내며 3년간 시묘했다.
1805년(순조 5) 묘갈은 의정부 우찬성 송환기가 썼고, 1829년 진위 유림이 요청해 1829년 7월 효자정려를 받았다. 배는 숙부인 고성이씨다.



| 원사립 묘역 |



원연元埏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산79(안골)



•현황 :원연(1543∼?)은 문신으로 자는 광보廣甫, 시호는 충절忠節, 원준량의 차남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3등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재를 모아 진위현 의병을 모았고, 용인 김량장리에서 왜적과 맞서 승리해 경기좌도로 침범을 못하게 했다. 임진왜란 후 연기현감, 적성현감 겸 양주진관병마절제도위로 임명됐으나 관찰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낙향했다. 증직으로 이조참의에 봉해졌고 1679년 충절인으로 정려됐다. 1829년(순조 29) 아들 사립과 함께 양세 충효정문을 세웠다. 묘역에는 묘표와 상석만이 남아있다.



원임元任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산67(샛골)



•현황 : 원임(1419∼?)은 1433년(세종 15) 무과에 급제하고 호조참판, 오위도총관을 역임했다. 증직은 가선대부동지 의금부사이다. 묘소에는 문인석, 석상, 동자석 등이 있다.



원전元㙉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산79(안골)



•현황 : 원전(?∼1597)은 원연의 동생으로 내리에서 출생해 임진왜란 때 고성현감이었고 원균 휘하의 종사관으로 종군했으며, 정유재란 때 원균과 함께 해전에 나가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통정대부 선전관에 추증됐다. 묘역에 신·구 묘표와 상석, 동자석 1쌍이 남아있다.



원준량元俊良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산67(신촌)



•현황 : 원준량(?∼1557)은 원균의 아버지로 무과에 급제한 후 춘추관 기사관·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했 다. 1557년(명종 12)에 경상도 병마 절도사로 임명됐으나 사림파에게 화 를 당한 후 향리에 은거했다. 아들인 원균이 선무 1등공신이 돼, 숭록대 부·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후 평 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묘 에는 신도비와 무인석 등이 있다. 신 도비는 1800년(정조 24)에 세워졌다.



| 원준량 묘역 |



이성부李聖符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산110(안골)



•현황 : 이성부(1583∼1624)는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존중存中이다. 시호는 충 장忠壯이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이원익을 체찰사, 이성부를 우방어 사, 이중로를 좌방어사로 해 진압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성부 장군은 선봉군 1000여 명으로 저탄猪灘(한탄강)으로 이동해, 이중로의 병력과 함께 배수의 진을 치고 방어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순절했다. 인조가 병조판서에 추증하라 했고 ‘충장’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충절정문을 세웠다. 묘는 그의 외종조부인 원몽의 묘(1398년 양주의 종산리에서 이전)에 있으며, 무인석과 묘표의 기단부만 전하고 비석은 세우지 않았다. 이 밖에도 원사립(1569∼1610), 원전, 원길상의 묘가 함께하고 우측 산록에 원연(1543∼1597)의 묘가 있다.



이정함李廷馠의 묘


소 재 지 : 송탄동 방혜마을



•현황 : 이정함(1534∼1599)은 송탄동 방혜마을의 경주이씨 선조다. 마을을 개척한 분으로 자는 백훈佰薰, 호는 퇴재退齋다. 1558년(명종 13) 진사에 합격하고, 삼례찰방參禮 察訪을 지낸 이탕李宕의 장자로서 후일 형제들의 높은 벼슬에 올라 이조참판에 추증됐다. 묘갈, 문인석 등이 있다.



이헌방李憲邦의 묘


소 재 지 : 모곡동 산30



•현황 : 이헌방(1494∼1540)은 조선 제2대 정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 수도군 이덕생의 4대손 문등부수文登副守 이륜의 둘째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평소 교류하던 조광조가 숙청되자, 관직을 버리고 조광조의 유허가 있는 진위로 낙향해 모곡동 일대에 정착했다. 모곡동 전주이씨의 입향조로 관직은 정3품 당하관인 군자감정軍資監正이었다. 묘에는 부인 남양홍씨가 합장돼있고 오래된 석물들이 최근 석물과 함께 배치돼 있다. 모곡리에 사당이 있었으나 주변에 산단이 조성되면서 철거됐다.



연안차씨 묘역


소 재 지 : 장안동 산92-6



•현황 : 차원부(1320∼1398)는 고려 말∼조선 초의 학자·화가다.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시호는 문절文節,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당대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학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해지자 사퇴하고,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가 주는 공신녹권功臣錄券을 거절하 고 정언正言·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 등의 벼슬을 사퇴했다. 송원松原에서 하윤河崙 등이 보 낸 자객에게 암살당했고 가족도 모두 살해됐다. 당시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梅花에 특기가 있었다. 1456년 세조는 문절공文節公의 시호를 내렸으며 증직은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문하시중이었다. 묘는 근대에 들어 200여 년간 실전되다가 망우리에서 1972년에 찾게 돼 장안동으로 이전 조성됐으며 인근에서는 가장 크고 화려하게 치장돼 있다. 석물은 묘비·문석인· 망주석·석등 등은 모두 새로 만들어졌고 이장 시 출토됐다는 도자기·술잔·수저 등은 문중에 보관돼 있다. 1993년 묘 서편 기슭에 종중 사당을 세웠으며 유물 전시관도 마련 했다. 묘의 뒷편 우측에는 아버지 월파옹 차종노의 묘가 있다.



| 연안 차씨 묘역 |



최경崔涇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산110(능말)



•현황 : 조선 초기의 화가. 호는 근재謹齋, 안산 출생이다. 벼슬은 세종 때 도화원별좌에 이르렀고, 성종 때 화원으로서는 최초로 당상관에 올랐다. 산수화와 인물화로 이름을 떨 쳤으며,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 1472년 소헌왕후昭憲王后·세조·예종·덕종의 어진御眞 을 그려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다. 작품으로 『백의관음상』, 『채희귀한도』 등이 있다. 1485년(성종 15) 당상관이 됐으며 순충보조공신으로 병조판사에 추증됐고 수성군에 봉 해졌다. 묘에는 문인석과 장명등 등이 있다. 묘갈은 1934년에 세워졌다.



최유용崔有容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406(능말)



•현황 : 최유용은 최경의 장남으로 조 선 인조 때의 인물이다. 일찍이 무과 에 급제해 가산군수를 지냈으나 37세 의 나이로 별세했다. 수성최씨 가산 공嘉山公파의 파조로서 증직은 통정대 부·병조참의다. 배는 진주유씨이고 묘역에는 묘갈과 망주석 등이 있다.



| 최유용 묘역 |



최윤종崔潤宗의 묘


소 재 지 : 송탄동 산51-4(중리)



•현황 : 최윤종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호조참판 행사산감역으로 추증됐다. 묘역에 묘표와 망주석이 있으나 새로 조성된 것이며, 아래쪽에 호조참판을 지낸 최언호崔彦浩의 묘가 있다.



최진운崔振雲의 묘


소 재 지 : 도일동 산110(능말)



•현황 : 최진운(1564∼1623)은 수성인이며 인조 때 형록亨祿의 아들이다. 1612년 생원과 진사에 동시 입격하고 1616년 별시 병과에 급제해 도사都事와 정랑을 지냈다. 묘갈은 1711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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