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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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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견산리見山里47)


갑오개혁 후 진위군 이북면이었다. 1914년 산직리·견산리·만촌을 통합해 진위군 북면 견산리라고 했다. 견산1리는 볼미다. 주민들은 볼미보다는 ‘벌미’ 또는 ‘벌말’이라고 부른다. 벌미는 벌판을 내다보는 위치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이것을 볼견자를 써서 견산見山이라고 표기했다. 한국전쟁 전에는 토박이만 80세대였다. 대대로 안성이씨가 세거했고 동족의식과 공동체의식도 강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야쿠르트공장 등이 입주하고 청도아파트·서원아파트 등 공동주택이 건설되면서 철거된 집이 많아 현재는 토착민만 60여 세대쯤 된다.


견산2리 산직촌은 우리나라에 흔한 지명이다. 이 지명은 조선시대 금산禁山정책의 산물이거나 유력가문에서 산지기를 두고 산을 관리하면서 유래됐다. 산직촌은 삼남대로 변의 주막거리여서 앞거리라고도 했다. 마을규모는 20여 호 정도다. 산직촌 뒤쪽의 한승아파트는 견산3리에서 5리로 바뀌었다. 대부분 외지인이고 주민들과 교류도 거의 없다.


견산리 일대는 조선후기 궁방전과 둔전이 많았다. 궁방전·둔전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에 귀속돼 일본인 농업이민자들이나 동척농장이 됐다. 경작지가 농민들에게 분급된 것은 해방 후 적산농지불하와 농기개혁 이후다. 해방 후 견산리 일대 대표적인 작물은 장호들의 쌀 외에 감참외와 수박이 있었다. 여름이면 진위천 변에 원두막이 즐비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참외 맛을 즐겼다.



장호들이 내려다보이는 견산리 볼미(2006)

| 장호들이 내려다보이는 견산리 볼미(2006) |



주석

47) 이기찬(67세), 유인숙(75세), 2006년 6월 견산1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