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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지명유래 > 팽성읍
■ 팽성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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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리客舍里


평택현의 읍치邑治였던 마을. 조선시대에는 객사·상신대·하신대·대정·교촌으로 나눠져 있었다. 1914년 객사리로 통합돼 부용면에 속했다. 1934년 9월 부용면이 서면과 통합되면서 팽성면의 면소재지가 됐다.



• 객사客舍 : 조선시대 평택현의 공해公廨 가운데 하나.

• 동촌東村 : 객사리가 2개 마을로 나뉘어져 있을 때 객사2리의 마을이름. 자연마을로는 새터·하신대·주막거리·
    대정촌이 있다.

• 주막거리 : 동촌의 다른 이름. 성환찰방에서 충청도 보령시 오천의 충청수영으로 연결된 역로驛路가 지나가던
    길목에 주막이 있어 유래됐다.

• 서촌西村 : 객사리가 2개 마을로 나뉘어져 있을 때 객사3리의 이름. 자연마을로 연못뚝과 향교말이 있다.

• 새터말 : 객사1리의 자연마을로 자비사 주변의 마을이다. 본래는 상신다리 또는 상신대로 불렸지만 지금은 신대
    또는 새터말로 부르고 있다.

• 상신대 : 객사리에 새로 형성된 마을로 상신다리라고도 부른다. 1789년 호구총수가 작성될 때는 신대리였다가
    19세기 후반에 마을이 커지면서 상신대와 하신대로 구분됐다.

• 하신대 : 새터말 옆에 형성된 마을로 하신다리라고도 부른다. 19세기 후반 신대리에서 분리됐다.

• 대정大井 : 객사4리의 자연지명으로 큰 우물이 있었다.

• 연못(뚝) : 객사4리의 자연지명으로 대정마을과 향교말 사이에 있었던 마을.

• 향교말 : 객사5리의 마을. 향교 아래에 있어 ‘교촌校村’ 또는 ‘향교말’, ‘향촌鄕村’이라 했다.

• 성바께 : 평택현 관아를 둘러싼 읍성邑 북쪽이었다.

• 부용산 : 조선시대 평택현의 주산主山. 안성천이 휘돌아 흐르는 곳에 위치한 모습이 부용(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모습과 같다는 데서 유래됐다. 해평 윤씨(윤보선 씨 집안) 가문이 소유하면서 윤씨 가문의 선산으로 유지되다가
     평택시가 단계적으로 매입해 시민공원으로 만들고 있다.

• 천덕산 : 객사1리 망한사(자비사) 뒤에 있었던 산. 1990년대 중반 공군아파트와 중앙아파트 등을 건설하면서
    없어졌다.

• 망한사터 : 객사1리 주막거리에 있는 대한 조계종 용주사의 말사인 자비사의 옛이름. 신라 말 당나라에서 건너오던
    배가 좌초해 표류하다가 팽성읍에 당도했던 선원들이 고향을 그리며 세운 사찰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 어걱다리 : ‘구억다리’라고도 한다. 망한사(자비사) 앞에 있었던 다리로 중국 사람이 언제 건너야할지 몰라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피망다리 : 객사리와 평궁리 사이 중간에 있는 다리.



근내리近乃里


조선시대 충청도 평택현 지역. 1914년 진위군 부용면에, 1934년 부용면과 서면이 통합되면서 팽성면에 편제됐다. 마을이 안성천과 가까워 근내라고 불렀다는 설과, 마을의 형세가 그네와 같아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 그네골 : 근내리의 자연지명. 마을의 형태가 그네모양이어서 유래됐다.

• 큰말·안말·외말 : 그네골의 자연마을.

• 까치울 : 그네골 남서쪽 골짜기.

• 안산 : 마을 앞에 있는 작은 산.

• 정하교 효자정문 : 근내리 마을 앞에 있는 정하교의 효성을 기려 세운 효자정려.

• 충정사 : 그네골에 있는 정담수 장군의 사당. 정담수 장군은 무과에 급제해 임진왜란 때 좌응양장 어란만호로
    이순신의 연전연승에 큰 역할을 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근내리로 물러나 여생을 보내다 죽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공신에 올랐고 후손들도 무과에 급제해 크게 이름을 날렸다.



남산리南山里


조선시대 평택현 동면지역. 1914년 평택군 서면이었다가, 1934년 4월 1일 부용면과 서면이 통합되면서 팽성면이 됐다. 평택현 관아의 남쪽에 있어 유래됐다.



• 남산南山 : 평택현 관아의 남쪽에 위치한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 마뫼 : 남산1리의 다른 이름. 청담중고등학교 앞에 말 무덤이 있어 유래됐다. 옛날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가다가
    이곳에서 죽자 말도 같이 따라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귀농촌歸農村 : 남산2리의 자연지명. ‘귀농정착사업장’이라고도 한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뒤 서울의 달동네
    주민들 가운데 이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집단 이주시켜 형성한 마을이다.

• 산직골 : 남산3리의 자연지명. ‘산직촌’ 또는 ‘색시촌’이라도 한다. 본래 대사리였다가 2000년경 남산3리로
     독립했다.

• 아랫사거리 : 산직촌 입구에 있는 마을. 둔포와 대사리, 송화1리, 평택방면으로 갈 수 있는 사거리가 형성되어
    유래됐다.

• 윗사거리 : 팽성초등학교 부근에 형성된 사거리로 위쪽에 형성돼 유래됐다.

• 남산4리 : 진양아파트 일대에 연립주택으로 형성된 마을.

• 석교산 : 남산3리 산직골과 대사1리 사이의 구릉.

• 남산리사지 : 남산1리에서 송화리 방면으로 가는 소나무 숲에 있는 용화사 터의 옛 지명

• 남산방죽 : 남산4리 진양아파트 앞에 있었던 방죽. 1939년(소화 14) 가뭄 때 일본인들이 배급을 주고 대대적으로
    보수해 수리조합 저수지로 사용했다.

• 서낭당 : 숫굴지나 귀농촌 넘어 가는 길목에 있었던 남산리 서낭당. 복숭아나무와 돌무더기가 있었다.



내리內里


조선시대 평택현 서면의 중심마을. 1914년 진위군 부용면 내리가 됐다. 면의 중심에 있어 유래됐다.



• 서면 : 내리의 다른 이름. 조선후기 평택현 서면의 중심이었다.

• 안터·작은말 : 내리의 자연마을.

• 향교터 : 마을 동북쪽으로 옛날에 향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염소말 : 내리 서쪽 야산에 대접처럼 움푹 들어간 지형으로 ‘염씨말’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염정승이 살았다고 하며 전성기에는 300호나 되는 큰 마을이 있었다고 전한다. 옛 건물터와 우물터,
    많은 양의 기와편이 출토된다.

• 청둥(동)리 : ‘산잿말’이라고도 한다. 산신제를 지낼 때 당샘이 있던 곳으로 물을 떠다 제를 올렸다.

• 영산 : 원정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당산堂山. 산신당이 있어 정월에 산신제를 지냈으며 상여와
    잡스러운 것들이 함부로 지나다니지 못했다.

• 조산 : 마을 서남쪽에 있었던 작은 구릉. 물난리 때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있으며, 평택현 서면 시절에 마을을
    비보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 개똥이 우물 : 향교 터 옆에 있는 우물. 향교에 소속된 노비가 팠다고 전해진다.



노성리老成里


고려시대에 경양현 지역이었다가 조선 태조 5년에 폐현廢縣되면서 평택현 남면에 속했다. 1914년 노중리·노상리·신성리 일부를 합쳐 노성리라 했다. 노성리라는 지명은 노중 과 신성에서 한 글자씩 빌려와 유래됐다.



• 노상 : 느새 위쪽에 형성된 마을.

• 노중 : 노성2리의 마을. ‘중리’라고도 한다.

• 느새 : 노성2리의 자연마을. 중리와 신성리 사이에 3호가 거주하고 있다.

• 신성리 : 노성1리의 마을. 신성포라는 나루가 있었다.

• 아래뜸, 윗뜸, 뱃터 : 신성리의 자연마을.

• 둔포천 : 안성천의 지류로 노성리와 아산시 둔포면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다.

• 군계천 : 둔포천의 지류로 조선시대에는 독천이라 했다.

• 세갈포 : 신성리와 둔포천 위쪽으로 물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 포구가 형성돼 유래됐다.



노양리老陽里


고려시대 경양현 지역으로 하양창이 있던 마을. 조선 태조 5년 하양창이 폐지되고 경양현이 폐현돼 직산현에 통합되면서 직산현 경양면 인처리, 어촌리가 됐다. 1914년 행정구 역을 개편하면서 노하의 ‘노’와 경양의 ‘양’에서 빌려 노양리가 됐다.



• 경양 : 노양1리의 다른 이름. 고려시대에는 경양현, 조선시대에는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을 모았던 경양포와
    경양창이 있었다.

• 계양 : 노양리, 본정리 일대의 별칭.

• 구루목 : 노양2리 자연마을. ‘계당말’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200호의 큰 마을이었다.

• 경양포 : 노양1리 ‘뱃말’. 고려시대에 하양창이 설치됐고 조선시대 경양창이 있었다.
    해방 전후에는 아산만의 대표적인 어항이었다.

• 노산 : 노양2리의 마을.

• 창말 : 뱃말에 있는 자연지명. 조선시대 경양창이 있었다.

• 비석거리 : 노양1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 거리지명. 직산현감의 송덕비가 있었다.

• 돌산 : 계당말과 꽃산 사이에 있는 산. 일본군이 굴을 뚫다가 중단했다.

• 꽃동산 : 노산 옆의 구릉.

• 당산 : 뱃말에 있는 산. 마을제당이 있었다.

• 계양해구 : 조선시대 노양1리 앞 안성천과 둔포천이 만나는 해구.

• 뱃말산 : 마을 서쪽 끝 양수장 뒤편의 산이름. 소나무 숲이 울창했지만 해방되고 땔감이 부족해지자 모두 벌목했다.

• 흙다리 : 돌다리 아래 당 아래에 있었던 흙으로 만든 섶다리. 둔포장을 보러 다니던 길목이었지만 경지정리하면서
    없어졌다.

• 노산돌다리 : 노양2리 노산마을에 있는 돌다리. 옛날 어느 장사가 혼자 돌을 들어다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노와리老瓦里


조선시대 평택현 동면지역.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련리와 와칠동을 통합해 노와리라고 했다. 해방 전후 노와3리 양천마을이 형성됐고, 한국전쟁 뒤 노와4리에 피난민촌이 형성되면서 현재는 4개 마을이 됐다.



• 노와老瓦 : 1914년 이전 노련리老連里와 와야리를 통합하면서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 취해 만든 지명.

• 동면東面 : 노와 1리의 자연지명. 평택현 동면東面의 중심마을이었다.

• 안말·바깥말·넘말 : 동면마을의 산등성이를 기준으로 좌우, 너머에 위치한 마을.

• 노련리老連里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 동면의 자연지명.

• 왜골 : 노와 2리의 자연지명. ‘와야리’, ‘평택왜골’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봉씨奉氏가 정착해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설과 기와를 굽던 가마가 있어 유래됐다는 설이 전한다.

• 양천良川 : 노와 3리의 자연지명. ‘새동네’라고도 부른다. 일제강점기에는 5∼6호의 작은 마을이었다가 물난리로
    평궁2리 상평 마을의 주민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마을이 커졌다.

• 피난민촌 : 노와 4리의 자연지명. ‘수용소’, ‘포막’이라고도 한다. 한국전쟁 뒤 피난민들의 정착촌이었다.

• 따비쟁이 : 피난민촌 황무지의 옛 지명. 따비(농사기구)로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유래됐다

• 농장 : 일제강점기 일본인 농장과 단무지 공장이 있던 곳.

• 북망산 : 동면마을 앞 평궁리 가는 길 중간에 있던 봉우리. 상례를 치를 때 상여가 넘나들던 산이었으며 웅덩이로
    된 큰 우물이 있어 노와리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

• 새터말 : 동면마을 동쪽 성환-아산 간 역로驛路가 지나는 길가에 있었던 옛 마을 터. 지금도 기와조각이 출토되는
     등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도둑놈이 많아 현재의 위치로 옮긴 뒤 폐동됐다 한다.

• 큰샘 : 동면에 있었던 마을 공동우물. 새벽에는 물이 넘칠 만큼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았다. 정월에 샘제사
    (우물고사)를 드렸다.

• 노와초등학교 : 노와1리 동면에 설립된 초등학교. 부용초등학교 노와분교로 됐다가 2002년 폐교돼 경기도유아체험
    교육원으로 바뀌었다.

• 소금장수길 : 노와3리에서 둔포장을 보러 다녔던 길. 소사동 소새장도 다녔다.



대사리大沙里


조선시대 대사동. 평택현 남면에 속했고, 1914년에는 서면 대사리에 속했다. 대사大沙라는 지명은 마을 앞 독천 변에 곱고 흰 모래밭이 펼쳐있어 유래됐다. 한국전쟁 뒤 대사2리에 피난민 수용소가 형성되면서 2개 마을로 늘어났다.



• 대사大沙 : 대사리의 본마을. ‘대삿골’이라고도 한다. 마을 앞 독천 변에 흰 모래가 많아 유래됐다.

• 큰말·작은말 : 대사1리의 자연마을.

• 수용소 : 대사2리의 자연지명. ‘피난민촌’이라고도 한다. 한국전쟁 뒤 피난민 수용소로 조성됐다.

• 승지골 : 대사리 큰말에 있는 지명. 옛날 승지벼슬을 지낸 사람이 낙향해 거주했다.

• 임금님길 : 대사리 큰말을 지났던 충청대로의 다른 이름.

• 행궁 : 큰말 김영식 씨 집터로 온양행궁 가던 임금이 묵어갔던 집.

• 영성청 : 조선시대 대사리에 설치돼 중앙과 연락업무를 담당하게 했다는 관청.

• 군계천 : 대사리와 성환읍 사이에 흐르는 하천. 조선시대에는 ‘독천’이라고 불렀다.

• 구개 : 옛날에 배가 들어왔던 뱃터. 갯가여서 유래됐다.



대추리大秋里


조선후기 평택현 서면지역. 단일마을로 경작지가 풍부하고 마을규모가 커서 대추리가 됐다. 1942년 일본해군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마을 일부가 수용됐고, 1952년 K-6미군기지 가 주둔하면서 곤지머리로 집단 이주 당했으며, 2007년 미군기지 확장사업으로 노와4리로 집단 이주했다.



• 곤지머리混池頭 : 안성천변의 나루. 고덕면 동고리 이포진, 현덕면 권관리의 계두진과 연결됐던 나루였다. 용신제를
     지내던 마을제당과 평택현의 기우단이 있었다.

• 황새울들 : 옛 대추리와 함정1리 서원말 사이에 형성된 들판.

• 흑무개들 : 도두리벌에 있는 들판. 한국전쟁 뒤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이 간척했지만 2006년 K-6 미군기지
     확장으로 수용됐다.

• 종제비 : 1988년 대추리 기우단에 동제洞祭와 기우제를 중단하면서 주민들이 세운 비.



도두리棹頭里


근대전후 도두리들 일부가 간척되면서 형성됐다. 지명은 바닷가를 향해 돛대처럼 길게 나와 있어 유래됐다. 1950∼60년대를 거치며 도두2리가 형성됐고 미군기지 확장사업으로 도두2리가 폐동되면서 도두1리만 남았다.



• 도두리 : 조선시대 마을 입구 도장산 위에 돈두정이 있어 ‘돈두정리’라고 불렀던 것이 1914년 도두리로 바꿨다.

• 신흥 : 도두2리의 자연지명. 일제강점기 암기원들이 간척되고 한국전쟁 뒤 도두리들이 간척되면서 모여든 사람들이
     형성한 마을이다. 미군기지 확장사업으로 폐동됐다.

• 공주촌 : 도두2리의 다른 이름. 1960년대 도두리들이 간척되면서 충남 공주·청양의 빈농들이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다. 현재 폐동됐다.

• 암기원동네 : 도두2리의 다른 이름.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 암기원이 간척한 암기원들에 마을이 형성돼서
     유래됐다. 현재 폐동됐다.

• 도장산 : 마을입구에 있는 야트막한 봉우리. 조선시대에는 돈두정이라는 누정이 있었으며 해방 전후까지 엄나무
     고목이 있어 주민들의 쉼터가 됐다.

• 돈두암 : 도당산 기슭에 있는 바위. 간척사업 전에는 바닷가에 우뚝 솟아 경관이 수려했지만 간척사업과 경지정리
    사업으로 흙 속에 묻혀 작은 바위로 변했다.

• 도두리들 : 도두리, 대추리, 신대리 일대에 걸쳐 있는 들판. 근대전후 소규모로 간척됐으나 한국전쟁 뒤 피난민들과
     빈농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대규모 간척이 이뤄졌다.



동창리東倉里


조선후기 평택현 서면지역. 1914년 부용면 동창리였다. 동창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평택현의 사창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됐다.



• 윗동네·아랫동내 : 동창리의 자연마을. ‘새악씨동네’라고도 부른다.

• 역당말 : 원정리에서 동창리를 거쳐 내리로 넘어가는 고개.

• 잿밭둑 : 동창리에서 내리로 넘어 가는 고개. ‘백현’ 또는 ‘잣고개’라고도 부른다.

• 사래물 : 마을 남쪽 비행장 들어가는 철조망 부근의 지명.

• 울찌니 : 황새울 너머에 있는 들판이름.

• 홍짓물 : 마을 남쪽 벌판에 있었던 웅덩이.

• 동창리 줄다리기 : 정월 대보름 풍년을 기원하며 동창리 마을회관 앞에서 거행됐던 놀이. 1980년대 초 중단됐다.



두리頭里


조선시대 평택현 읍내면. 1914년 누촌(다락말)과 북면의 근내리 일부를 통합해 두리라 했다. 두리는 두1리의 ‘머래’에서 왔다.



• 두리頭里 : 두1리의 한자지명으로 ‘머래’라 한다. 마을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이고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해 유래됐다는 설, 군물포에서 안성천을 건너면 첫머리에 해당 한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 다락말樓村 : 두2리의 자연지명. 조선전기 부용산 위에 관가정이 있었고 그 뒤쪽 마을이다.

• 소망뎅이산 : 머래마을 뒷산. ‘쇠머리산’이라고도 한다. 풍수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인데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해
     유래됐다.

• 쇠머리굽논 : 논의 위치가 풍수적으로 소의 머리가 굽어지는 곳에 있어 유래됐다.

• 쇠터배기 : 두2리 다락말 부근의 공터. 지형이 소의 턱 부분에 해당해 유래됐다.

• 소안(눈) : 다락말 부근에 있는 지명. 소의 눈 부위에 해당해 유래됐다.

• 까치울 : 머래마을 뒤 산등성이 너머 다락말 가는 곳에 있는 작은 골짜기.

• 통한 : 다락말에서 남동쪽으로 미곡처리장까지 넓은 들판.

• 다락말 향나무 : 다락말 앞에 있는 향나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 기원하면 자녀를 얻을 수 있었다 한다.

• 머래 왕소나무 : 머래마을 쇠물굽이 산등성이에 있는 수령 180년 정도의 소나무.



두정리斗井里


조선시대 평택현 남면지역. 1914년 두곡리와 월정리를 합쳐서 진위군 서면 두정리라고 했다.



• 두곡 : 두정2리 대농골의 자연지명.

• 월정 : 두정1리 큰농고지의 옛 이름.

• 도화동 : 두정3리의 자연지명. 본래 작은농고지라고 불렀다가 주민들의 발의로 1998년 경 옛 지명으로 바꾸었다.

• 덕장골 : 간척사업 전 안정리 사람들이 둔포장을 볼 때 지나다니던 골짜기.



본정리本井里


조선시대 직산현 경양면. 1914년 본정리라 했다. 1952년 K-6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기지후문 아리랑고개에 기지촌이 형성됐고 지금은 1·2리로 분동됐다.



• 본정리 : 1914년 본언리와 경정리를 합쳐서 만든 지명.

• 새나리 : 본정1리의 자연지명. 옛날에 마을에는 상주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탐학이 심해서 나라에서 새 관리를
     파견해 옛 관리를 벌주고 마을을 평온케 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 새동네 : 본정1리의 자연마을. 일제 말 함정1리 주민들 5∼6호가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다.

• 아리랑고개 : 본정2리의 자연지명. 1952년 K-6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 꽃산 : 본정1리 남쪽에 있는 산. 봄이 되면 진달래꽃이 만발해 유래됐으며 산기슭에 홍익한 선생 묘와 비각,
     계성초등학교가 있다.

• 노산나루 : 본정1리와 노산마을 사이에 있었던 나루.

• 노산돌다리 : 노산마을 앞에 있는 돌다리. 옛날 어떤 장사가 혼자 들어다가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없어졌다.

• 둥글재 : 본정2리 아리랑고개의 옛 지명.



석근리石斤里


조선시대 평택현 남면지역. 1914년 석다리와 서근보를 합쳐 석근리라고 했다.



• 석다리 : 석근1리의 자연지명. 마을 앞으로 흐르는 군계천에 돌다리를 놓아 건너다녔기 때문에 유래됐다.

• 흙다리 : 석근1리 돌다리가 놓이기 전에 있었던 흙을 쌓아 만든 다리.

• 서근보 : 석근2리의 자연지명. 마을 앞에 성환천을 가로막아 보를 쌓았다고 해 유래됐다. 서근보는 해방 전 후만
     해도 석근리·대사리·노와리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했다.

• 고씨촌 : 서근보의 옛 지명. 옛날에 제주 고씨들이 많이 살았다 한다.

• 용지봉 : 석다리 마을 뒷산. 산신단이 있어 마을제를 지냈으며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평택군(시)과 팽성읍에서
     기우제도 올렸다.

• 비석골 : 서근보 가는 길에 있는 도라 위쪽으로 비석들이 서 있었다. 한국전쟁 뒤에 없어졌다.



석봉리石峯里


조선시대 평택현 북면지역. 1914년 흑석리와 원봉을 통합해 석봉리가 됐다.



• 석봉리 : 1914년 흑석리(검은돌) 마을과 원봉마을을 통합했다.

• 흑석리黑石里 : 석봉리의 중심마을. ‘검은돌’, ‘안동네’라고도 한다.

• 구억말 : 검은돌 동쪽에 있는 마을. 구석에 위치했다.

• 새터 : 검은돌 서남쪽 마을.

• 피난민수용소 : 한국전쟁 뒤 황해도 피난민수용소가 있어 유래됐다.

• 북새장터 : 피난민수용소의 다른 이름.

• 뗏장거리 : 석봉리 입구에 있던 지명. 한국전쟁 뒤 피난민 수용소가 설치됐다.

• 원봉 : 석봉리 동쪽 안성천 변에 있었던 마을. 나루가 있었으며 군물포와 연결됐다.
    1946년 수해를 겪었고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폐동廢洞됐다.

• 대형산 : 석봉리 서북쪽에 있는 산. 천지개벽 때 대형에서 떠내려 왔다고 전해진다.

• 석봉나루터 : 석봉리 서쪽 안성천 변에 있었던 나루. 석봉양어장과 낚시터가 있었으며 안성천 건너 동고리
     이포나루를 통해 궁리와 연결됐다.



송화리松花里


조선후기 평택현 남면지역.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송당상리·중리·하리·개화리가 통합되면서 송화리가 됐다.



• 개화리 : 송화1리의 자연지명. 1934년까지 진위군 서면의 면소재지였다가 부용면과 통합됐다.

• 암말, 늠말, 마우지 : 송화1리의 자연마을.

• 송하 : 송화2리 신당골의 자연지명. 윗말·아랫말로 나뉜다.

• 송중 : 송화3리 큰말의 자연지명.

• 신흥 : 송화4리의 자연마을.

• 언덕말 : 송화5리의 자연마을. 언덕배기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 갯골 : 송화1리 개화마을 앞에 있었던 갯고랑.

• 번개들 : UN도로 부근 하수처리장 아래에 있는 들판.

• 배다리 : 옛날에 배로 건너다니던 곳으로 신당골 마을 앞 가시내기 아래에 있다.

• 추간방죽 : 추간에 있었던 저수답. 경지정리로 사라졌다.

• 소당산 : 미군기지 물탱크옆에 있는 산. 서낭당이 있었다.



신궁리新宮里


조선시대 평택현 읍내면 지역. 1914년 하궁리·신흥리·호치동 일부가 통합돼 신궁리가 됐다.



• 신궁新宮 : 1914년 신흥리와 하궁리가 통합되면서 유래된 지명.

• 하궁리 : 신궁1리의 마을이름. 평궁1리 상궁(평)의 아래쪽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유래됐다.

• 중새터 : 신궁1리의 자연마을. 들판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었는데 1946년 병술년 물난리를 겪으면서 폐동廢洞됐다.

• 함판 : 신궁2리의 자연마을. 새로 간척된 한판들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유래됐다.

• 다릿개 : 군문교 근처에 형성된 마을이름. 군문포에서 팽성읍으로 건너오는 나루터였다



신대리新垈里


조선시대 직산현 경양면 지역. 1914년에는 신대1리 새터뿐이다가 한국전쟁 뒤 피난민들이 신대2리 영창마을과 3리 장단마을이 형성했고, 신대4리 말랭이는 한국전쟁과 1960~70년대 도두리벌이 간척되면서 형성됐다.



• 새터 : 신대1리의 자연지명.

• 영창 : 신대2리의 자연지명. 한국전쟁으로 철원에서 피난 내려와 안정7리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됐다가 1954년
     팽성읍 신대2리로 집단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영창은 정착 초기 도두리들 간척을 주도했던 이석경 씨의
     아호다.

• 장단 : 신대3리의 지명. 한국전쟁 때 장단수용소가 설치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 말랭이 : 신대4리의 자연지명. 한국전쟁 때 피난민 일부와 1960년대 공주·청양지역의 빈농들이 마을을 형성하면서
     유래됐다.

• 안터 : 신대1리 새터의 옛 터. 신대2리 마을 서북쪽에 위치했다.

• 망해산 : 신대2리 영창마을 뒷산. ‘봉우재산’으로도 부른다. 조선시대 망해산 봉수가 설치됐다.

• 도두리들 : 신대리·도두리·대추리에 걸쳐 형성된 약 500만 평의 들판. 조선 말기부터 개간되다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뒤 대대적인 간척이 이루어졌다. 현재 대부분 지역 이 미군기지 확장으로 수용됐다.



신호리新虎里


조선시대 평택현 읍내면지역. 1914년 신대와 호치를 통합해 신호리라고 했다.



• 신촌 : 신호1리의 자연지명. ‘새말’이라고도 한다.

• 호치虎峙 : 신호 2리의 마을. 범고개에서 유래됐지만 간척사업 때 산을 허물어 매립하면서 사라졌다.

• 범치말 : 호치의 자연지명. 석봉리의 지형이 범아가리와 같아 이곳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 까치울 : 범칫말에 있었던 마을. 토탄이 많이 출토됐다.

• 여승지 : 신호1리 새말 북서쪽 능선 움푹 패인 곳. 승지벼슬을 지낸 여呂씨 가 북향으로 묘를 썼던 곳에서 유래됐다.



안정리安亭里


조선시대 평택현 남면. 본래는 서정자리와 안현 두 마을뿐이다가 세집매, 일곱집매가 형성됐다. 1914년 서정자와 안현이 통합돼 안정리가 됐다. 일제 말 일본 해군비행장이 건설되고, 한국전쟁 중에는 K-6미군기지가 건설되면서 서정자 마을이 폐동되고 일곱집매 일대에는 기지촌이 형성됐으며, 안정7리 인근에 피난민촌이 형성되면서 12개 마을로 늘어났다.



• 길마재 : 안정1리·5리·10리의 마을이름. ‘안현’이라고도 한다. 본래는 안정1리만을 의미했지만 마을이 늘어나면서
     분동됐다. 마을의 형국이 길마(말안장)처럼 생겼다고 해 유래됐다.

• 서정자 : K-6 미군기지 신정문 안쪽에 있었던 마을. 1952년 미군기지 주둔으로 폐동돼 길마재와 송화리로
     이주했다. 옛날 정자亭子가 있어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쉬어갔다고 한다.

• 일곱집매 : 안정3리 자연지명. 서정자 서쪽에 있었으며 일곱집이 마을을 형성해 유래됐다. 미군기지 구정문에
     위치해 기지촌의 중심이 됐다.

• 성터말 : 안정4리 자연지명.농성 동쪽 큰길가에 형성된 마을.

• 시장통 : 안정6리의 마을. 안정리 시장이 있는 곳에서 유래했다.

• 신흥 : 안정7리의 마을. 본래 피난민촌으로 새롭게 흥성하라는 뜻에서 지었다.

• 국민주택: 안정12리의 마을. 마을 안에 국민주택단지가 조성돼 유래됐다.

• 농성農城 : 축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둘레 300미터 내외의 토성. 신라 말 중국에서 이주한 임팔급이 쌓았다는
     설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식량을 저장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도 있다. ‘성산’, ‘이성’이라고도 한다.

• 이성재 : 원정리에서 안정리로 넘어 오는 나지막한 고개. 농성(이성)으로 넘어오는 고개라고 해 유래됐다.

• 구정문 : 1951년 K-6 미군기지 정문으로 사용했던 곳. 앞으로 안정리 쇼핑몰이 형성됐다



원정리院井里


조선시대 평택현 북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원정리가 됐다. 원정리는 마을에 맑은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어 ‘먼우물(원정遠井)’이 됐다.



• 먼우물 : 원정의 자연지명. 마을에 물맛 좋은 우물이 있어 유래됐다는 설과, 원정사라는 절 아래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 원원정 : 정말의 다른 이름. 원정리의 중심마을.

• 정말 : 원정리의 자연마을. 정문 서쪽에 위치했으며 임진왜란 때의 명장으로 충신정문이 내려진 방덕룡과 효자
     방시중의 정려가 모셔진 비각이 있어 유래됐다.

• 큰말 : 정문 동쪽마을.

• 응당말 : 정말 동쪽에 있는 마을의 자연지명. ‘응달말’로 불렸던 것이 ‘응당말’이 됐다.

• 탑상골 : 정말 동쪽 언덕배기 마을. 옛날 고개마루에 탑과 암자가 있어서 유래됐다.

• 마른물 : 정말 동북쪽의 마을. ‘마름물’이라고도 한다.

    ① 마을에 맑고 시원한 우물이 있어 맑은 물로 불리다가 마른물이 됐다.

    ② 말우물馬井 600년 전부터 살아 온 온양 방씨 족보에 의하면 조상들의 묘를 마정馬井옆에 썼다는 기록으로 보아
         말우물이 마른물로 불려진 듯 하다.

• 진등 : 남쪽 긴 능선에 형성된 마을의 자연지명. ‘긴등’이라고도 한다.

• 장수바위 : 마을 앞 안성천 변에 있었던 바위. 밀물의 거친 물살에 장수바위가 창내리쪽으로 쓰러지면 홍수 때
     창내리 들판을 파먹고, 원정리 쪽으로 쓰러지면 흉년이 든다고 생각했다.

• 용우물 : 정말 뒤쪽에 있었던 우물.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 뱃터 : 원정리 북쪽 끝자락 안성천 변에 있었다. 안성천 건너 창내리에서 배가 닿았다.



추팔리秋八里


조선시대 평택현 동면東面지역이었다가 1914년 추팔리가 됐다. 조선시대 성환찰방의 화천역이 있던 마을로 ‘역말’, ‘추팔’로 불렸다.



• 화천역 : 조선시대 성환찰방에 소속됐던 역.

• 역말 : 추팔1리의 자연지명. 화천역이 있었던 마을에서 유래됐다.

• 면산 : 마을이 형성되기 전 팽성면(읍)에서 관리하는 국유지가 있어 유래됐다. 해방 후 마을이 형성돼 추팔공단이
     들어선 뒤 규모가 커지면서 추팔2리가 됐다.

• 윗뜸우물 : 윗뜸에 있는 우물. 물이 맑고 좋아 옛날에 곱사가 우물물을 먹고 허리를 편뒤 걸어 나갔다고 한다.
     ‘숫우물’이라고도 한다.

• 아랫뜸우물 : 아랫뜸에 있는 우물. ‘암우물’이라고도 한다.

• 당산 : 역말 동쪽 성황당이 있는 산

• 장승백이 : 역말에서 객사리로 넘어 가는 고갯마루. 옛날에 장승이 있었다.



평궁리平宮里


조선시대에는 평택현 읍내면. 1914년 상궁리·동면 상평리·직산군 삼서면 와우리 일부를 통합해 궁평리라고 했다가 평궁리가 됐다.



• 상궁리上宮里 : 평궁1리의 자연지명. 조선후기 궁궐과 왕족들에 의해 평궁리들이 궁방전으로 개간되면서 궁방전의
     위쪽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 내월 : 평궁1리의 마을. 궁방전의 안쪽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 새터 : 평궁2리의 마을. 성두아파트 뒤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 상평 : 평궁3리의 마을. ‘윗궁말’이라고도 한다. 평궁리 위쪽에 마을이 있어 유래됐다.

• 통한들 : 평궁리 일대에 형성된 들. 조선 말기에 명례궁과 왕족 순화군의 궁방전이 많았고 일제강점기에는
     동척농장과 일본인 농장이 많았다.

• 번개들 : 평궁리와 신궁리 일대 들판.

• 궁들 : 번개들의 다른 이름. ‘궁들’, ‘궁평’이라고도 한다.

• 평택농악전수관 : 평궁1리에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의 전수회관.



함정리咸井里


조선시대 평택현 서면. 1914년 함등촌과 경정리가 통합되면서 함정리가 됐다. 20여 년 전에는 본정2리 아리랑고개까지 통할했지만 분동되면서 마을규모가 줄었다.



• 서원말 : 함정1리의 자연지명. 조선시대에 화포 홍익한을 모신 ‘포의사’가 있어 유래됐다. ‘선말’이라고도 한다.

• 포의동 : 함정1리의 다른 이름. 병자호란 때 삼학사의 한사람인 홍익한을 모셨던 ‘포의사’가 있었던 마을에서
     유래됐다.

• 말랭이 : 함정 2리의 자연지명. 일제강점기 말 서원말 주민들이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고 1950∼60년대 도두리벌이
     간척되고 충청도 이주민들이 모이면서 마을 규모가 커졌다.

• 선말산 : 서원말 서쪽에 있는 산. 선말고개도 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