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국회의원선거(1967. 6. 8)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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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대 국회의원선거(1967.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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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후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각 정당의 창당준비위원회가 정당정치 발전에‘암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창당준비위에 대한 규제권 조항을 담은 정당법을 신설해줄 것을국회에 건의했다.11)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돼 활동 중인 정당은 민주공화당·민중당·신한당·추풍회·정민회·신민회·자유당·한독당 등 8개뿐이었으나 이외에 1963년부터 1966년 11월까지 정당결성 신고만 한 창당준비위원회가 23개나 됐다.
1963년 결성신고를 한 뒤 1966년까지 창당대회를 열지 않은 창당준비위도 16개였다.12)
1967년 6월 8일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 경기도 제9지역구인 평택지역에서는 8명이 입후보했다. 민주공화당 경기 제9지구당 위원장 출신의 이윤용 후보가 47.6%를 얻어 41.2%를 얻은 신민당 유치송 후보를 누르고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선거 직후 유치송 후보는 이윤용 당선자에 대해 금권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공화당은 6월 16일 긴급당기위를 소집하고 평택의 이윤용을 비롯한 문제지구의 후보자들을 제명하기로 했다. 이것은 박정희 총재의 특별지시에 따른 것이었다.13)
그러나 이윤용은 계속 지구당 위원장 역할을 고집했고 지구당 명의로 ‘부정이 없었다’는 내용의 인사장을 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윤용 당선자는 부정선거 논란 끝에 그해 9월 공화당에서 공식 제명됐다.14)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제6대 때와 같이 지역구 의원과 전국구 의원을 선거했다. 전국구 의원으로 공화당 27석, 신민당 17석이 분배됐고 평택 출신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영희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최영희는 1944년 2월 일본 센슈대학日本專修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학도병으로 끌려가 소위까지 진급했으나 해방 직후‘조선학병동맹’결성에 참여했으며 공산주의적 편향에 반대해 탈퇴하고 ‘학병단’을 결성한 일이 있다.15)



[제7대 국회의원 선거 평택군 후보자별 득표현황] 16)

(1967. 6. 8 시행)

구분 유효투표수 후보자별 득표수 및 득표율(%)
평택군 66,678 통한당 자유당 민중당 대중당
정광순 정존수 김동진 안정용
191
(0.28)
3,508
(5.26)
979
(1.46)
1,291
(1.93)
신민당 민주공화당 한국독립당 민주당
유치송 이윤용 이병국 김진택
27,472
(41.20)
31,587
(47.57)
1,158
(1.73)
492
(0.73)


주석

11) 23개 창준위는 다음과 같다. 자민당(이종윤), 자유대중당(백기완), 주민당(최종순), 중화서민당(임근호), 삼일당(정인해), 조선민주당(오영진), 법국민연맹(김성조), 구국혁명총연합(송지섭), 민족혁명총연합(최윤동), 민우당(송호상), 대한민주자립당(정진구),난민회(황충영), 농민당(유동균), 신한국민당(이용재), 서농민황도당(김인형), 민주회(김득조), 통일사회당(김성숙), 鄭天黨(정득룡), 민주당(김정룡), 청년민주당(이상록), 건국민주당(김종호), 국민당(오창욱), 민주사회당(서민호) 

12) 『경향신문』, 1966년 11월 7일자
13) 『경향신문』, 1967년 6월 16일자 
14) 『동아일보』, 1967년 9월 6일자; 『경향신문』, 1967년 9월 25일자 
15) 제1대~16대 육군참모총장 13명 가운데 최영희를 제외한 12명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 
16)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통계시스템 제7대 국회의원선거 개표진행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