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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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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頭里10)


두리는 팽성읍의 두물머리다. 자연지명도 ‘머래’이고 한자로는 두리頭里다. 마을은 객사 리 부용산에서 북동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의 남동쪽 끝에 자리 잡았다. 조선전기만 해도 두리 앞 머래들과 번개들, 쇠머리굽들은 갯가였다.


풍수적으로 두리는 와우형臥牛形이다. 두1리 머래마을 뒤쪽의 소망뎅이산은 다른 이름이 쇠머리산, 다시 말해서 소의 머리다. 다락말과 머래 사이에는 쇠머리굽논이라는 지명이 있 으며, 두2리 다락말에는 쇠터배기와 소의 눈이라는 뜻인 쇠안이라는 지명이 있다.


마을은 쇠머리 안쪽과 목덜미에 형성됐다. 근대 전후의 간척사업은 처음에는 두2리 다락말과 부용산 사이의 쇠머리굽논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나중에는 통한들로 확대됐다. 쇠머리굽논 지역을 간척한 시기는 19세기 후반이다. 간척은 명례방과 같은 궁실宮室과 수어청같은 군영이 시작했다. 조선말기 간척된 궁방전과 둔전들은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면서 동양척식(주)과 일본인 지주, 음봉 신항리의 해평윤씨 소유로 넘어갔다. 일부 미개간지는 일본인들이나 동양척식(주)에 의해 간척되기도 했다.11)


두2리 다락말은 오래된 마을이다. 18세기 팽성지에도 ‘누리樓里’라는 이름으로 기록됐다. 다락말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활발했던 마을로 유명하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 모범마을로 지정받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두1리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들은 동척농장과 일본인 농장의 농감農監들이었다. 해방직후 머래마을의 동척농장 곡물창고에는 부용초등학교 분교장이 설립되기도 했다. 분교에는 두리마을뿐 아니라 신궁리, 평궁리 어린이들도 다녔다.



머래들의 간척으로 큰 마을이 된 두1리 머래(2009)

| 머래들의 간척으로 큰 마을이 된 두1리 머래(2009) |



주석

10) 유진구(58세, 두1리 이장), 김현성(74세, 두2리), 김지회(74세, 두2리), 박병희(70세, 두1리), 김지회(74세, 두1리), 현광진(81세, 두1리), 박우일(66세, 두1리), 2009년 8월 4일 두1리, 두2리 경로당에서 인터뷰
11) 1906년 4월 4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는 진위군에 거주하는 이용돈이 농상공부에 호소하기를 ‘자신들이 살고 있는 벌판을 일본인이 개간한다고 값을 정하고 팔도록 강요하는 것을 거부했더니 협박하고 일본헌병 3명을 보내 동장(이장)을 잡아가고 존위마저 잡아 보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