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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리南山里
남산리는 평택관아의 안산이었던 객사리 남쪽 남산 기슭 마을이다. 남산의 자연지명은 마뫼다. 마뫼에서 ‘마’는 남쪽을 뜻한다. 조선시대 읍치에서 고을의 수령과 아전들은 내아內衙와 읍성邑城 안에서 살았고, 남산 기슭에는 관청과 연관된 양반, 농민, 수공업자, 관노들이 섞여 살았다. 1914년 남산리는 동면에 속했다가 행정구역 조정으로 진위군 서면에 편제됐다. 1934년 부용면과 서면이 통합될 때 팽성면 남산리가 돼 오늘에 이른다.
남산리는 남산(1리)·귀농촌(2리)·산직촌·사거리(3리)·진양아파트(4리)로 구분된다. 남산1리 남산마을은 조선 초에 형성됐을 것이다. 약 300여 년 전 진주 강씨가 입향하고 덕수 장씨가 들어오면서 양반과 농민층 중심의 마을로 형성됐다. 한국전쟁 뒤에는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반공포로를 비롯해 남부지방의 빈농들이 정착하면서 마을규모가 커졌다. 2005년 이후에는 마을 북쪽으로 도로가 가설되고 우미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일부 가옥들이 수용돼 2013년 현재 80여 호로 줄었다.
남산2리 귀농촌은 1960년대 초 정부가 서울지역 빈민들 가운데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집단 이주시키던 귀농정착사업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남산3리는 산직촌과 사거리다. 산직촌은 근대 이전 금산정책에 따라 산을 관리하는 역役을 부여받았던 마을이거나 산지기가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마을규모가 확대된 것은 해방 전후다. 1960년대 마을주변에 집창촌이 형성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지만 30여 년 전에 해체되면서 다시 줄어 현재는 50여 호만 남았다. 사거리는 객사리에서 둔포로 지나가는 45번 국도가 지나고, 대사리에서 송화1리 개화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에 형성된 마을이다. 본래는 국도 45호선 경계로 송화1리와 대사리로 나눠졌지만 10여 년 전 남산3리로 분리 독립하면서 같은 마을이 됐다. 호戶는 두 마을 합쳐 80여 호쯤이다.
| 남산리의 중심마을 남산1리(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