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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리客舍里1)
객사리는 팽성읍의 중심마을로 조선시대에는 평택현의 읍치邑治였다. 읍치에는 관아시설과 교육기관 등의 공공시설이 있었다. 고을의 읍치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며 경관과 방어에 유리한 위치에 두었다. 마을의 주산은 부용산이다. 관아官衙 주위에는 읍성邑城이 있었다. 읍성은 성곽이기보다는 관아를 둘러싼 담장에 가까웠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이후에는 부용면사무소와 경찰지서가 들어섰다. 부용면사무소는 1934년 부용면과 서면이 팽성면으로 통합되면서 팽성면사무소가 됐다. 객사리는 지금도 행정·교육·상업·금융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객사리는 성씨도 다양하고 인구밀도도 높다. 근대이전의 인구는 정확하지 않다. 주민들 대부분은 고을의 수령과 관아에 소속된 아전과 사령, 관노비 그리고 관아와 향교에 부역을 담당했던 농민과 수공업자들이었을 것이다. 근대 이후 인구가 유입됐다. 새로운 인구는 일제에 의해 수용됐거나 해평윤씨, 방달용씨 등이 소유한 부용산 남쪽을 중심으로 정착했다. 해방 전후 객사리의 인구는 객사1리 20호 내외, 객사2리 20호 내외, 객사3리 15호 내외, 객사4리 10여 호 내외, 객사5리 15호 내외였다. 한국전쟁 뒤 안정리 K-6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객사1리 새터와 하신대, 객사4, 5리 연못둑과 향교말에 많은 사람들이 정착했다. 객사6리 천덕산에 공군아파트·중앙아파트·객사5리에 향교아파트·이수주택 등이 들어섰다. 2013년 현재 객사리에는 1,200여 세대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객사 1리에 760여 명이 거주해 가장 많은 인구밀도를 갖고 있다.
객사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객사리客舍里·상신대리·하신대리·대정리·교촌이 통합돼 팽성읍객사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객사리’가 됐다. 1980년대 초에는 객사리가 1리와 2리로 분리되면서 새터·주막거리·하신대·대정촌은 동촌에, 연못둑·향교말은 서촌으로 나눠졌다. 1990년대 초 인구증가로 마을이 6개로 분동되면서 1리는 새터(상신대)와 하신대, 2리는 주막거리와 객사, 3리는 대정, 4리는 연못둑, 5리는 향교말, 6리는 공군아파트와 중앙아파트로 편제됐다.
객사1리는 300세대가 넘지만 해방 전후만 해도 20호에 불과했다. 이것이 19세기 말 상신대(새터)와 하신대(하신다리)로 나눠졌다. 객사2리는 주막거리다. 주막거리는 객사리에서 안정리 방향과 남산리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일대다. 조선후기 충청대로 객사리 초입이어서 주막이 있었다. 처음에는 주막과 관련된 집들만 서너 집 있었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호수가 증가했다. 객사3리는 대정촌으로 성광감리교회 아래쪽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성광교회 주변은 관아의 동헌東軒과 질청, 향청이 있던 곳이다. 대정은 해방 후까지만 해도 20호를 넘지 않았다. 대체로 일제강점기 해평윤씨 집안의 종중산과 묘역을 관리하는 산지기가 살다가 한국전쟁 뒤 허가 없이 외지인들이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 객사4리는 연못둑이다. 연못둑은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10여 호의 작은 마을이었다. 연못둑이란 마을 안에 큰 연못이 있어서 유래됐다. 객사5리2)는 향교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어서 향교말이다. 한자로는 교촌校村으로도 쓴다. 향교말 사람들은 역役을 면제받는 대가로 향교와 관련된 부역을 담당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향교말은 농사를 짓는 15호 정도가 거주하는 마을로 향교 4리에 있었다. 1990년대 중반 향교아파트와 이수주택 등이 들어서면서 분동됐다.
| 객사 삼거리(2008) |
주석
1) 이남훈(76세), 객사3리 거주, 2009년 인터뷰
2) 박석실(77세), 객사5리 향교말 노인회장, 2009년 전화로 인터뷰